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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 - 오세훈 후보 포토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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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강금실 후보는

열린우리당 강금실(49) 서울시장 후보의 지인들은 그를 가리켜 "통 크고 포용력 있는 여자"라 입을 모은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강 후보와 주변 사람은 그 같은 성품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 불심 깊었던 어머니=강 후보의 어머니는 불심이 깊었다. 돌아가시기 전 경기도 가평에 절을 지어 조계종에 보시할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 강 후보가 법무부 장관 물망에 오르던 때부터 '무속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강 후보의 고교.대학 동창인 한국무용가 김경란씨는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라 일축했다. 김씨는 "금실이 어머니는 불심과 영성(靈性)이 강했고 독학으로 득도에 가까운 경지에 올랐던 분"이라고 말했다.

강 후보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홍난파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는 음악교사였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미국에 사는 큰 오빠는 1970년대 당시 드문 남성 재즈 뮤지션으로 악기에 능했다. 둘째오빠는 약대를 졸업한 뒤 약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경란씨는 "금실이의 가족 성향은 '반골성' '예술성' '종교성(영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빵재비'들 집회장 된 결혼식=강 후보의 전 남편 김태경씨는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둘의 사랑은 김씨가 운영하던 서점 민중문화사에 강 후보가 드나들면서 싹텄다. 84년 치러진 결혼식은 운동권 빵재비(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집회를 방불케 했다. 운동권의 대부격인 고 김진균 교수가 주례를 섰고, 탈춤반 동료 커플이 쌍학춤을 췄다. 강 후보는 웨딩드레스 대신 흰 한복을 입었고 김씨는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결혼한 뒤 그들의 신혼집은 운동권 후배들의 아지트였다. 김씨의 운동권 후배인 영화감독 여균동씨는 "후배들이 숙식을 해결하고 집을 더럽혀도 강 후보는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출판사를 하던 김씨의 빚 문제 등으로 둘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낸다.

◆ 법조 '큰언니'=참여정부 출범 당시 국민참여수석(이후 참여혁신수석)을 지낸 박주현 변호사는 강 후보의 대학 6년 후배다. 그는 85년 고시에 붙은 뒤 판사이던 강 후보를 찾아가 "여성학 공부를 하자"고 했다. 강 후보가 커리큘럼을 짰고, 박 변호사와 후배 두 명이 합세해 1년간 강 후보 집에서 공부했다.

전 남편의 빚에 떠밀려 96년 변호사로 나선 강 후보는 민변에 가입했다. 그는 386 출신 변호사들의 큰누나 역할을 했다. 갚아야 할 빚이 많았지만 술값을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았고 노래방에선 늘 먼저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 한쪽만 고집 않는 포용성=집안은 불교 내력이지만 강 후보는 법무장관이 된 뒤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대모는 춘천지방법원장을 지낸 이영애 변호사다. 이 변호사의 남편은 15대 신한국당 의원을 지낸 김찬진 변호사. 강 후보와는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강 후보는 이 변호사에게 영세 문제를 의논했고, 법무장관이 된 뒤에도 이 변호사가 주관하는 여성 법조인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모임을 함께했던 판사 출신의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 많은 자리였지만 강 후보는 늘 얘기를 경청했다"고 말했다.

강 후보가 법무장관일 때 검찰국에 근무했던 한 검찰간부는 "강 전 장관은 국가보안법 철폐론자였지만 존치를 주장하는 공안검사들을 이해해 주는 쪽이었다"고 기억했다.

이가영 기자

오세훈 후보는

한나라당 오세훈(45) 서울시장 후보는 '강남' 이미지다. 깔끔하고 잘생긴 용모에 변호사라는 직업, 부드러운 말투까지 영락없는 '웰빙' 분위기다. 그에 대한 공격은 여기에 집중된다. 경쟁 후보 진영의 파상 공세에 시달린 탓인지 오 후보는 15일 작심한 듯 어린 시절의 고달픈 기억들을 끄집어 냈다.

◆ 판자촌 전전=1961년 서울 뚝섬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 후보는 빈촌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건설회사는 경영난으로 월급이 잘 안 나왔다. 오 후보는 삼양동 달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 가장 고달팠다고 회상한다. "전기가 안 들어와 밤에는 책을 못 봤어요."

부친이 부산시 광복동에 근무하던 3~5학년 시절엔 사무실 한쪽을 나무 판자로 막고 살았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중2 때 어머니가 남대문시장에 수예품점을 내면서다. "살림은 나아졌지만 비좁고 침침한 가게에 어머님이 앉아 계신 모습이 마음 아팠지요."

오 후보의 핵심 공약은 '도심 상권 부활'이다. 그는 시장 상인의 역할이 대단하다고 믿는다.

◆ "정치인 될 줄 상상 못해"=오 후보의 동창들은 그를 '조용하고 착했던 모범생'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은 "세훈이가 법조인은 몰라도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결혼 스토리가 눈에 띈다. 그는 동갑인 부인 송현옥(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씨를 고2 때 처음 만났다. 현옥씨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준공탑을 준비하다가 요절한 조각가 송영수 전 서울대 교수의 딸이다. 현옥씨의 오빠인 상호(경희대 교수)씨가 몸이 아파 학교를 1년 쉰 뒤 오 후보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세 사람은 함께 과외를 하게 됐다. 난생 처음 과외를 하게 된 오 후보는 10분이라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과외가 새삼스럽지 않던 현옥씨는 '농땡이'였다. 과외는 깨졌다.

두 사람은 고3 때 입시학원에서 다시 만났다. 오 후보가 길에서 자판기 땅콩을 사주며 "너 고등학생의 몇 %가 담배 피우는 줄 아니◆ "라며 실없이 묻는 모습에 1년 전 '꽁생원'과는 다른 면모를 봤다고 현옥씨는 회상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고려대 문과대에 응시했지만 오 후보만 낙방했다. 후기인 한국외대에 입학했던 오 후보는 2학년 때 고려대 법대에 편입, 영문과에 다니던 현옥씨와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 됐다. 현옥씨 어머니는 오 후보가 외아들에 동갑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딸에게 쏟은 5년간의 정성에 마음을 열었다. 둘은 오 후보가 사법시험에 붙은 직후인 85년 결혼했다.

◆ "오세훈 법에 안 걸릴 것"=사법연수원 기말시험 날 세균성 장염에 걸려 낙제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1년 더 다니는 곡절 끝에 수료한 오 후보는 군 복무를 마치고 91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94년 대기업을 상대로 한 아파트 일조권 소송을 이겨 스타가 된 뒤 방송 진행자 등을 거쳐 2000년 총선 때 국회의원(서울 강남을)이 된 오 후보는 유독 후원회 운영을 힘들어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이런 풍토에선 좋은 사람들이 정치계에 남아 있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치자금을 옥죄는 '오세훈 법'을 만들고 17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그 자신이 지금 그 법에 옥죔을 당하고 있다.

"우리 선거 캠프는 철저한 자원봉사입니다. 옛날 선거판을 생각하고 왔다가 돌아간 사람도 많아요. '오세훈 법'이라고 만들어 놓고 오세훈이 걸리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강주안.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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