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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사위 만나 촛불로 밤새워|은둔 6일 맞은 전씨 부부와 백담사 주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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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내설악 계곡의 백담사에 은둔 한지도 벌써 6일째. 날이 갈수록 전씨 부부는 참회와 고행의 무겁고 침울한 표정 속에 인과응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불교계에서 전씨 부부의 은둔에 대해 「자비무적의 포용」과 「정법 수호의 도장을 더럽힌 10·27법난의 장본인이다」는 주장이 엇갈려 은둔자의 심기는 산너머 산. 유배와 유랑의 귀로에선 전씨 부부의 여정은 국민의 눈길 속에 어쩌면 매서운 겨울바람과 낙엽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전씨 부부가 딸·사위·외손녀와 함께 지낸 27, 28일 이틀 밤의 객실방은 평소 오후 9시면 꺼지던 촛불 빛이 밤새 켜져 있어 눈길.
한 스님은 『방안에서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밤새 촛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미뤄 사연 많은 얘기가 오갔을게 아니겠느냐』며 『이들 부부가 밤잠을 설치고 눈언저리가 부어있어 은둔의 산사 상봉에 눈물을 많이 흘린 것 같다』고 귀뜀.
딸 효선씨는 28일 오전 5시10분 절을 떠나기 전 배웅하는 스님·경호원들에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 잘 보살펴주십시오』라며 깍듯이 부탁했다고.
이들은 당초 27일 밤 귀경 예정이었으나 시위대 때문에 하루 늦게 떠났으며 당초 전씨 부부가 『막내아들이 꼭 보고 싶다』고 서울에 연락했으나 학교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고 딸 부부가 대신 문안 왔다는 것.
전씨는 은둔 후 6일 동안 한번도 면도를 하지 않아 턱수염이 더부룩한 얼굴은 몹시 초췌한 모습이며 3일전부터는 아침·저녁 예불 때 부부가 함께 불상 앞에서 절을 많이 하는 등 참회의 빛이 더욱 역력해졌다고 스님들이 전언.
또 목욕은 고사하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초췌한 모습으로 예불을 드려 안쓰러울 정도라고.
한 스님은 『전씨 부부가 평소에는 예불 때 삼배를 한 후 스님들이 독경과 의식을 올리는 동안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아 묵상만 했으나 노 대통령 담화가 발표된 지난 26일 이후부터는 스님들을 따라 수없이 절을 하고 있다며 심경에 변화가 큰 것 같다』고 했다.
전씨가 새로운 은둔처로 곧 옮길 것이라는 말들이 나도는 가운데 한 경호원은『전씨가 산사에서 참회의 고행을 하기로 작정한지라 생활의 불편은 견딜 수 있지만 불교 종단의 반발 등으로 사찰측이 누를 입을까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고 밝혀 은둔처 이동은 28일 오후에 열리는 조계종 종무회의의 결과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전망. 이에 따라 김도후 주지가 27일 상경해 「전-이씨 사찰 은둔」 문제를 놓고 모종의 결단이 임박했음을 암시.
특히 전씨가 백담사에 올 때 수행했던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민정기 비서관이 지난 25일 두번째 상경한 후 계속 서울에 머무르면서 관계 기관 등과 은둔처 문제를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이들이 내려오면 은둔처 이동 여부가 금명간 판가름날 것으로 예상.
그러나 전씨가 안전을 위해 동해안에 있는 군장성 휴게소로 옮기게 될 것이라는 일부 보도에 대해 한 측근은 『그렇지 않아도 군사 정권이란 비난을 받아온 전씨가 군의 입장을 또다시 곤경에 빠뜨리는 일은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해 은둔처를 옮긴다해도 여론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개인 가옥을 택할 것으로 전방.
백담사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설악산 국립 공원 관리 사무소 백담 지소는 전씨 부부의 은둔이 시작된 지난 23일 밤부터 경찰 초소로 아예 둔갑, 관광 안내 등 본연의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난 실정.
지소 건물 전면에 있는 1·5평짜리 매표실에는 사복 경찰관 2명이 경비 전화까지 가설해놓고 상주하고 있으며 바로 옆 10평 규모의 사무실은 전경 10여명이 독차지해 지소 직원들은 앉을 자리도 없는 등 업무는 거의 마비 상태.
특히 건물 앞 도로에는 차단기 앞에 3중 바리케이드를 치고 출입 차량의 번호와 승차자의 신원과 인원 등을 전경들이 일일이 점검하면서 해가 진 후에는 취재 차량까지 출입을 금지시켜 검문소를 연상.
한 직원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물론 철저히 해야 되겠지만 타 기관의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며『만약에 관광 등반객이 많이 몰리는 가을철에 이랬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 투덜.
전씨 부부가 은둔한 백담사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경찰 경비망이 27일 밤 시위대에 뚫리자 현지 경찰 간부들은 얼떨떨한 표정에 크게 난감해하기도.
경찰은 24일부터 전경 1개 중대와 사복 경찰관 등 2백여명을 동원, 사찰 앞 공터와 백담 지소는 물론 15km 떨어진 한계 삼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입구에서부터 검문 검색을 했고 용대 삼거리와 도로 곳곳에도 전경을 3∼5명씩 배치, 경비를 강화했으나 시위대의 진입으로 경비가 허술했음이 여실히 노출.
대학생·재야 단체 23명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이날 오전 9시 춘천과 원주에서 직행 버스 편으로 출발, 오후 2시쯤 집결지인 강릉에 모여 다시 버스를 타고 양양∼한계령을 거쳐 오후5시20분 원통에 도착한 뒤 이곳에서 용대 삼거리까지 시내버스를 이용, 기습 시위를 해 경찰의 허를 찌른 것.
이들은 오는 동안 한번도 검문에 걸리지 않았고 용대 삼거리에서 백담 지소까지 1·4km를 대열을 지어 구호를 외치며 달렸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
전씨 경호원 측에서 절 입구 외나무다리 앞에서부터 기자 출입을 통제하는 등 일체의 취재진 접촉을 피해 백담사 앞에서는 취재 차량 10여대와 취재진 30여명이 연 6일째 하루종일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떨며 취재 경쟁.
특히 백담사 근처에는 인가도 없고 인근 백담 산장도 전씨가 사찰 은둔을 시작한 직후부터 문을 닫아 문전걸식 취재나마 하기 위해 절 앞에 기자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절 앞 개울물을 남비에 끓여 식수 등을 해결.
전씨 부부의 사찰 은둔에 대해 조계종 내부에서 강한 반발이 일고 있는 가운데 김도후 주지가 27일 오전 종무회의 참석차 상경한데 이어 이날 밤에 전씨 부부의 은둔처 제공을 비난하는 강원도 내 재야 및 대학생들의 시위까지 겹치자 백담사 측은 매우 당혹스런 표정으로 안절부절.
백담사와 8km거리에 인접한 인제군 배면 용대 2리 주민들은 27일 밤 전씨 부부의 구속 처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우려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났다』며 모두들 놀란 표정들.
용대 삼거리 S식당 주인 염모씨 (52·여)는 『TV에서만 보던 시위 장면을 두메산골에서 직접 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전씨 부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 한 시위는 계속될텐데…』라며 한숨.
경찰은 이날 최루탄을 쓰지 않고 시위자 22명을 30분만에 모두 연행, 진압했으나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주민들은 연도에 나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구경하기도.
전-이씨가 제2의 은둔지로 언제 떠날 것이냐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있는 가운데 27일 오전 10시쯤 경호원 1명이 전씨의 전용차인 그랜저 승용차의 차량 정비와 연료 보충을 해 눈길이 집중.
이 경호원은 백담사 앞 빈터에 주차 중인 전씨 승용차를 몰고 어디론가 갔다가 오후 1시쯤 다시 돌아왔는데 기자들의 질문에 『차량 정비와 연료를 채웠을 뿐』이라고 설명.
그러나 전씨의 주장대로 백담사에 장기 체류할 경우라면 굳이 연료를 가득 넣어둘 필요가 없어 제2의 은둔지 행이 곧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 <백담사=권혁룡·제정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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