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청산 새 출발 결의 천명|노 대통령 특별담화와 정국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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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의 11·26 시국담화는 국민의 열화 같은 추궁에 밀려 벼랑 끝에서 결심을 했다는 점과 그 내용이 국민과 야당의 요구를 파격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제2의 6·29선언으로 평가되고 있다.
6·29가 홀랑 벗고 민주화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노 후보」의 국민에 대한 항복문서였다면 이번 담화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벌주는 일 빼고는 모두 다 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화해조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6·29선언이 정통성 없는 제도와 민주화 시비를 종식시킨 도전자의 결단이었다면 이번 담화는 비뚤어진 5공의 역사를 털고 매듭짓겠다는 통치자의 결의천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는 6·29가 그 선언 하나로 들끓던 문제를 즉각 진화시킬 수 있었던데 반해 이번 담화는 그 효력과 전망을 예측하기가 훨씬 불투명한 점인 것 같다.
이번 담화는 한마디로 5공 비리와 전 전 대통령 문제를 『이것으로 끝내자』는 노 대통령의 비원과 호소가 농축돼 있다. 물론 그 직접적인 배경은 6·29직전과 마찬가지로 지금이 국가적 위기라는 현실인식과 진단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극적인 반전의 계기를 잡지 못하면 통치권의 무력화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 민주화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나라발전을 한 단계 높이겠다는 대통령 나름의 일대 승부수인 셈이다.
담화문은 전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5공 비리의 적극적 청산을 위한 민주화합 조치를 밝히면서, 나아가 국가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3단계 논법으로 구성돼 있다.
노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 문제 처리에 관한 여론의 동향을 ①사법적 처리를 통한 단죄 ②진상조사후 사면 ③무조건 사면의 3가지로 파악하고 이중 ③안을 선택하면서 그 이유를 실명했다.
전 전 대통령이 직접 관련된 의혹 중 핵심인 정치자금은 개인적 행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정치자금의 명세를 밝히면 지난 7년 반을 모두 파헤쳐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할뿐 아니라 여야정치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어서 사회통념과 안정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자금은 전 전 대통령의 고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더 이상의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대신 그 밖의 5공 비리는 철저히 진실을 밝혀 처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전씨를 뺀 나머지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예컨대 장세동·안현태씨 등 측근들은 전씨와 직접 관련이 없는지 돌출의 비위가 나타나면 처벌하겠다는 것이라고 청와대 참모들은 풀이하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은 5공 비리수사와 처리를 정부가 능동적으로 주도하겠으며 연내 조기매듭을 위해서는 국회 각종 특위의 조사활동까지 궁극적으로 떠맡겠다고 밝혔다. 5공 특위의 경우조사대상 44건 중 이제 겨우 일해재단 1건의 청문회를 마쳤는데 그런 식으로 어떻게 조사활동을 연내에 마무리짓겠느냐는 인식이다.
따라서 야당의 특별검사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검찰 내에 전담반을 편성, 일해재단·새 세대 육영회비리 등을 직접 수사토록 할 방침이다.
전씨의 국내외 은닉재산이 있는지 여부는 조사하겠다고 했지만 크게 체중이 실린 언급 같지는 않아 보이며 전씨의 사면과 형평을 맞추어 년 내에 단행하겠다고 내놓은 6개항의 민주화 진전 조치는 상당히 획기적이고도 전향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국사범의 석방과 복권은 간첩을 빼고 다 풀라는 야당과 재야의 요구를 사실상 다 받아들인 것이다. 장기표씨 등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 등 검찰이 한사코 반대해온 대상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그야 말로 새 출발을 각오한 것으로 알려 졌다.
또 특별법을 제정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를 보상하고 명예회복을 시키기로 한 것이나 80년 해직공직자를 88년 시점에서 명예퇴직에 준하는 보상을 해주겠다고 한 것은 5공의 조치를 1백% 과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청 교육 사상자는 신고를 받아 보상하기로 했으며 해직공직자 보상을 위해 1천억원 가량의 재원을 확보했고 정부가 직접 손댄 해직기자까지 보상대상에 포함시킬 예정으로 알려졌는데 곧 관계부처별로 후속조치를 취해 가시화 될 것 같다.
정치자금 문제는 차제에 양성화·제도화 해 앞을 내다보는 해결책을 찾기로 했으며 준 조세폐지 등 정경유착의 제도적 단절을 약속했다. 담화에 언급은 안 했지만 전씨가 내놓은 1백39억원은 여야합의에 따라 용처를 결정할 생각이다.
나아가 공권력의 엄정 집행을 다짐하고 미래지향적인 에너지의 결집을 호소했다.
노 대통령은 이 모든 약속을 6·29 선언 때 모든 걸 다 바쳤던 결단과 의지로 밀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획기적 처방에도 불구, 6·29 선언 때 국민들이 보였던 환호와 기대가 되살아날지는 불투명하다.
수긍할 수 있는 요인에 비해 국민들의 감동이 줄어든 것은 전 전 대통령문제를 매듭짓기까지 청와대와 연희동간에 벌인 지나친 소모전, 청문회 등으로 조성된 국민여론의 악화가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지난 9개월간 노 대통령이 보여준 정책결정 및 집행에서의 과단성결여, 그로 인한 문제 해결의 잦은 실기와 신뢰감소, 여소 야대로 인한 대통령의 힘의 한계, 수시로 원칙을 바꾸어 나오는 야당의 대여 공세 등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담화의 성공여부는 대통령·야당·국민간의 위기극복에 대한 시각조정과 공감대형성이 관건이며 그런 의미에서 담화발표이후 노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보일 정치력이 주목된다.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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