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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를 주시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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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7일 온종일 많은 국민들이 TV앞에 몰려 사상유례없는 정치쇼를 구경했다.
국회5공 비리조사특위가 제2차 청문회에서 5공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청와대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차례로 역임한 장세동씨를 증언대에 앉혔기에 국민의 관심이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여하튼 일해재단의 흑막이 드디어 밝혀지는가 싶었다. 그래서 모두들 장씨의 입을 장장 12시간에 걸쳐 뚫어지도록 쳐다보았지만 기대가 허탈감으로 허물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해재단에 대한 제2차 청문회 제1일은 여야국회의원들의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정치쇼를 보여 주었을뿐 장벽속에 가려진 일해재단의 실체를 들추어내는데 미흡했다. 한마디로 이 청문회가 일해재단설립의 순수성과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하는 장씨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 장소가 된 것이 아니었나 의문을 지울수 없었다. 장씨는 6백억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 모으는데 강제성이 조금도 없는, 재벌들의 자발적인 모금행위임을 되풀이 강조할 뿐이었다.
더우기 이 재단의 설립목적이 아웅산사건의 유족에 대한 위로금과 장학사업에다가 「6천만 민족의 숙원인 통일사업」에 있다고 미화까지 했다.
또한 그는 전두환씨의 퇴임후 계속하여 권력장악을 구상했다는 문서, 「2000년대를 향한 청사진」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거부했다. 야당의 한 김씨에게 전씨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 장씨 자신의 월간지 인터뷰내용에 대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국민의 궁금증만 증폭시켰다. 그래서 그는 TV중계를 밤12시까지 지켜본 국민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끝까지 유지할뿐 사과의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이 청문회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노무현의원(민정당)등의 매우 날카로운 물음에 말꼬리가 잡히는 대목들이 가끔 나왔다 . 그것은 일해연구소가 숨겨왔던 거대한 5공비리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단서가 될듯하다.
장씨는 이 재단자금을 청와대경호실장으로서 모금·관리했음을 시인했고, 청와대가 새마을 성금과 새세대육영회·새세대심장재단·일해재단의 헌금을 끌어 모은 접수창구였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났다.
이 같은 사안들이 국민과 단 한마디 협의도 없이, 명색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집무처 청와대에서 저질러졌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국가공무원은 국회의 승인없는 돈을 한푼도 쓸수 없다. 예산에 책정된 범위안에서 수입과 지출이 집행되어야 함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아도 이미 19세기말 갑오개혁때, 국가예산제도를 처음으로 수립했다. 고종왕이 서약공포한 홍범14개조에 따르면 세금의 과징과 경비의 지출은 도지아문(재무부)이 관장하고 (7조), 왕실의 비용은 솔선 절약하여 아문 및 지방관청의 모범이 되어야하며 (8조) , 왕실과 관부비용은 연간예산을 작성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9조) 고 했다.
임금이 나라 돈을 통치라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쓸수 있는 시대는 이미 19세기말에 끝장났던 것이다. 임금은 비록 의회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왕정시대지만 재무부의 예산배정에 따라, 그것도 각 행정부와 지방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솔선 절약해 경비를 쓰지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국민의 동의없이 세금을 거들 수 없게 규정한 것은 프랑스절대왕정시대 말기로 갑오개혁의 내용과 비슷하다.
1789년5월 삼부회의원들이「루이」16세에 제출한 진정서는 국왕이 국민의 동의 없이는 어떤 세금도 징수할 수 없으며, 국왕을 위한 헌금과 차용금은 삼부회의 승인없이 얻을 수 없다고 요구했었다. 「루이」l6세가 이를 모두 받아들였음에도 대혁명이 일어났다. 이 진정서의 요구는 1789년10월에 공포된 헌법 1조15항에 그대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일해재단에 대한 청문회는 5공시대의 청와대가 수천억원의 막대한 돈을 국민에게 숨기고 수금하여 국민의 동의없이 쓴 5공비리의 일부에 불과하다.
스위스의 대통령은 해외출장때 동부인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사무를 볼 때는 개인 자가용차를 손수 운전한다고 한다. 의회가 승인한 예산을 배정받지 못한 까닭이다. 개인소득 2만달러의 세계에서 제일부자나라 스위스가 이렇다.
요컨대 장씨는 전씨의 권력을 청문회에서 절대권력운운 했는데, 이는 전직대통령을 모독한 말이 아닌가. 5공의 정체가 갑오개혁이전의 조선조시대나 「루이」16세 이전의 절대왕정시대를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몽상가가 아닌가. 그는 5공을 절대왕정시대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국민은 하루속히 5공비리의 청산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국회의 청문회는 갓막을 올렸을 뿐이다. 전국민이 국회의원들과 증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날카롭게 주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편집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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