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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떼먹은 사람 찾아간 '헐크'가 부처가 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35)

땡전 한 푼 없었지만 태백으로 올라와 살던 그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재밌었던 것 같다. 그림은 피사로의 ‘붉은 지붕의 집 풍경’. [중앙포토]

땡전 한 푼 없었지만 태백으로 올라와 살던 그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재밌었던 것 같다. 그림은 피사로의 ‘붉은 지붕의 집 풍경’. [중앙포토]

땡전 한 푼 없이 태백으로 올라와 살던 그때. 지금 생각하면 빚 독촉을 받는 등 삶 자체 혼란스러웠지만 지나고 나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고 재밌었던 것 같다.

그땐 탄광에 취업하면 직장 이름 아래 적힌 고유번호표를 명함같이 줬다. 그것만 있으면 장사하는 모든 곳에서 다 쓸 수 있었으니 요즘의 카드 역할이었다.

거기에 한 달에 한 근의 돼지고기와 연탄 쌀이 배급되었으니 기본으로 먹고살 수는 있었다. 2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타면 어린 아기의 한 달분 우유와 남편의 소주 한 박스만 추가로 사면 됐으니 반 이상을 부채 탕감해 나가도 조금은 또 적금을 넣을 수 있었다.

2년이 지나 20만원의 돈이 모였다. 당시 한 달 치 월세가 1만5000원이었는데 사글세를 내고도 돈이 모여서 은행에 넣자니 목돈이라고 사채꾼들이 빼앗아 갈 것 같아서 싸고 또 싸서 집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1000원짜리 지폐라 부피가 꽤 컸다.

어느 날 남편은 작업 동료라는 젊은 남자를 데리고 와서 술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이는 탄광에 적을 두고 있지만 이전엔 한의원을 했다나 뭐라나 하면서 자기가 비공식적으로 치질 수술을 해준 사람도 있고 어쩌고 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신기한 약초를 샀는데 빨리 갖고 와야 제 것이 될 수 있는 물건이고 탐내는 사람이 많아 월급날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돈이 필요해 구하는 중이라면서 슬쩍 돈 빌려달라는 얘기를 흘렸다.

남편은 내 의견을 묻지 않고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려줬다. [사진 pixabay]

남편은 내 의견을 묻지 않고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려줬다. [사진 pixabay]

남편은 몇 년을 모아 놓은 돈을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꺼내더니 우선 보태 쓰라며 손에 쥐여줬다. 본인이 너무 힘들게 살아와서 그런가 열심히 살아도 힘든 이웃에게 젊었던 내 남편은 배급 나온 고기도 쌀도 잘 나눠줬다.

그런데 월급날이 지난 건 고사하고 그 사람이 어느 날부터 출근을 안 하더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위의 엄청 많은 동료가 모아놓은 돈을 건네줬다고 했다.

그 사람이 전한 직업은 한의사에서 사업가 등등 여러 가지였다. 전혀 다른 이야기로 여러 사람의 주머니를 털었는데 많이 빌려준 사람은 100만원도 넘게 줬다. 20만원은 적은 금액이었지만 우리에겐 힘들게 모은 엄청 큰돈이었다. 일반 직장에서 번 돈과 달리 광산 막장에서 번 돈을 금액을 떠나 빚을 갚으며 절약 또 절약하며 모은 것이라 남편에겐 피 같은 것이었다.

도망자는 헐크로 변한 남편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손에 든 삽자루에 깔려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음이었다. 돈놀이한 것도 아니고 동병상련으로 도와준 본인에게 사기를 쳤으니 남편의 기분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동시에 살벌한 광산 분위기에서 잘못해 사건이 뒤집히기라도(?) 하면 남편이 먼저 암살당해 죽을 것 같은 공포감도 들었다.

며칠 뒤 남편은 그 사람의 주소를 알아내어 그 집을 찾아가겠노라고 했다. 나는 친한 옆집에 아이를 맡겨놓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때의 남편은 바로 살인사건을 낼 만큼 흥분해 있었다.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요즘 같이 내비게이션이 있길 한가,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대관령 부근이었는데 하필 그때 눈이 너무너무 많이 와서 기차역에서부터 대절해서 간 택시가 더는 못 간다며 우리를 중간 어디쯤 내려주고는 돌아 가버렸다. 남편이 무기로 들고 간 삽자루는 무릎이 푹푹 빠지는 길을 여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다.

을씨년스러운 시골 외딴집엔 젊은 부인과 아기만 살고 있었다. [중앙포토]

을씨년스러운 시골 외딴집엔 젊은 부인과 아기만 살고 있었다. [중앙포토]

한참을 걸어 찾아간 집은 너무 을씨년스러운 시골 외딴집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없고 젊은 부인과 아기만 살고 있었다. 남자는 몇 달째 들어오지를 않았단다. 남편은 털썩 주저앉아 아무 말을 안 했다. 폭설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나 모르니 거기서 잠복 삼아 자고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날 그 추운 냉방에서 우리 부부는 솜이 없는 홑이불에 있는 정 없는 정 다 꺼내어 끌어안고 잤다. 옆방에선 젊은 부인과 아이도 얇은 이불에 의지해 껴안고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지금도 겨울이 오면 검은색 광목으로 만든 홑겹이불이 생각난다.

다음날 새벽에 남편은 마당에 있던 장작을 패서 아궁이 옆에 수북이 쌓아놓고 우리가 여비 삼아 갖고 온 돈에서 반을 이불 밑에 넣어놓고 아침 해가 뜰 때쯤 말없이 나왔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몇 달째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을 보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부부가 함께하면 어떤 고생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옆에서 얘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는 것을. 그때 앞에서 눈을 치우며 걷는 헐크로 보이던 남편의 모습이 부처님같이 자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후로 투덕거릴 때마다 그날이 생각나면 전쟁은 저절로 휴전으로 들어가곤 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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