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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엄마는 안 된다고? 日 초등 학부모회장 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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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1)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현재의 교장선생님과 교장실에서. 한국의 신문에 얼굴을 올려도 되겠냐고 하니 &#34;물론이죠&#34;라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사진 양은심]

현재의 교장선생님과 교장실에서. 한국의 신문에 얼굴을 올려도 되겠냐고 하니 &#34;물론이죠&#34;라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사진 양은심]

재일교포도 믿으려 하지 않고, ‘뉴커머(한국에서 나고 자란 후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도 믿기 어려워하는 일이 있다.

‘한국인 여자가 일본에서 PTA(Parent-Teacher Association. 학부모-교사 협의회. 한국의 학부모회에 해당) 회장을 했다’라는 사실이다.

수년 전 한 일본인 친구가 60대의 재일교포에게 이 말을 전했다. 단박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국인 친구가 자랑스러운 마음에 뉴커머에게 한국인이 PTA 회장으로 뽑혔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일본 여자들이 얼마나 차별이 심한데. 절대 한국인에게 회장 자리를 내어 줄 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엽게도 그 두 친구는 누군가의 거짓말을 믿고, 가당치도 않은 말을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돼 버렸다.

출산·육아에 큰 각오 필요한 일본 생활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큰 각오가 필요하다. [사진 pixabay]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큰 각오가 필요하다. [사진 pixabay]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큰 각오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당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출산 결심을 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아이를 낳은 후 외국인 엄마를 둔 이유로 불편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치원과 학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본인인 남편은 아이의 학교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교문제는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고, 일본을 배운다는 기분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큰아이가 5학년일 때는 PTA 회장까지 맡아서 했다. 처음부터 회장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어떤 조직의 장이 된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학부모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엄마 2명으로 구성되는 집행부 부회장단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다. 회장은 남자부회장단에서 선출하는 것이 아들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관례였다.

입학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누가 PTA 회장이 됐는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학교 측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사상 최초로 회장 부재의 PTA가 될 상황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나와 함께 부회장을 맡기로 했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내가 회장을 하게 되면 그녀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2007학년도 PTA회장 시절. 졸업식 날. 졸업생들에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스스로 &#39;자신을 갈고 닦으라&#39;라고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PTA회장 시절의 사진이 없어서 교장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계약하고 있는 사진관에 연락해서 마련해 주셨다. [사진 양은심]

2007학년도 PTA회장 시절. 졸업식 날. 졸업생들에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스스로 &#39;자신을 갈고 닦으라&#39;라고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PTA회장 시절의 사진이 없어서 교장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계약하고 있는 사진관에 연락해서 마련해 주셨다. [사진 양은심]

“사카다씨, 내가 회장을 해버릴까 하는데 어때?”
“실은 나도 자기가 했으면 하고 있었어. 그런데 무거운 짐을 지우기가 미안해 말을 못 하고 있었어.”

“오케이. 사카다씨가 좋다면 할게. 시간이 없으니 부교장(교감)을 만나서 보고하자.” 둘이서 학교를 찾아가 부교장에게 말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제가 회장을 맡아 학교와 아이들에게 누가 된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말씀해 주세요.” “아닙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해주신다면 학교 측으로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가 도쿄의 구립 초등학교에서 PTA 회장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일본인의 따스한 응원에 힘입어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나의 회장 선임에 용기를 얻었다는 한국인 엄마도 있었다.

지역 학부모회장단 모임에서도, 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 회의에서도, 나는 한국인임을 누누이 공개해 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인에게 우호적으로 변하는 일본 학교

일본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일본의 구립 초등학교 PTA 회장을 할 수 있는 사회로 변해 있었다. 앞으로 더 변해갈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일본 전역이 다 그런 분위기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렇다. 지금은 회장을 역임한 인연으로 아들이 나온 초등학교의 고문으로 있다.

인생의 무대를 일본으로 바꾼 지 25년이 다 되어 간다. 앞으로는 한국에서 살아온 날보다 일본에서 사는 날이 더 길어질 것이다. ‘남의 나라’였던 일본이 이제는 ‘내가 사는 나라’가 되었다. 나는 ‘풀뿌리 외교관’이라 자처하며 도쿄의 하늘 아래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군정 시절 조직된 PTA

마지막으로 일본 학교의 PTA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다.  PTA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 미군에게 점령당할 당시 미국교육사절단의 권고와 문부성의 협력으로 생긴 것이라 한다. 그전에는 ‘후원회’나 ‘학부형회’라 불리는 조직이 있었고, 학교경영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PTA는 임의단체이며 가입과 탈퇴는 자유다. 그래서 소수이지만 가입하지 않는 보호자도 있다. 회원은 소액의 PTA 회비를 내며 그 자금으로 행사를 진행해 나간다. 이 조직은 전국적인 것으로 ‘일본 PTA 전국협의회’도 결성돼 있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조금씩 관례나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PTA는 학교의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학부모와 교사가 협력을 이끌어내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운동회 날의 교정과 교외의 정리, 방학 기간에 이루어지는 특별활동, 학교 개교기념일의 기념행사 등을 준비하고 진행한다.

최근에는 PTA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는 걸 보면 PTA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있는 조직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임원이나 위원을 맡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해마다 뒤를 이을 임원 선정에 애를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인인 내가 회장을 할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육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있는 만큼 PTA 존재 방식도 달라져야 할 때가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zan32503@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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