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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20명 복제했다고 ? … 아니, 네가 복제본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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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당신과 똑같은 누군가를 얻게 된다면?

인간 복제와 관련돼 흔히 나오던 질문이다. 대답은 "회사에 출근시키고 나는 쉬겠다" "곤란한 맞선 자리에 보낸 뒤 훗날(?)을 도모하겠다" 등. 복제된 또 다른 '나'는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문제 해결사로 등장하곤 했다. 여기서 인간 복제는 현재의 '나'가 늘 주체였다. 현실의 '나'란 존재가 있기에 자기 복제의 전제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 그런데 현재의 '나'가 알고 봤더니 복제된 '나'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원천 기술을 보유한, 본래의 '나'와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연극 '넘버'는 바로 이 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편리성'으로만 포장된 인간 복제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내가 21명?

"연출, 노동절인데 오늘은 우리도 좀 쉬지?"

1일 저녁 서울 대학로 연습실. 육십을 훌쩍 넘긴 연극 배우 이호재씨(65)가 슬쩍 농을 건넨다. 묵묵부답. 이어진 이성열(43) 연출가의 쐐기 발언. "공연이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갈 길이 너무 머네요. 오늘은 밤 10시까지 네 시간 동안 줄기 차게 달리겠습니다."

연습은 부분 연습과 런 스루(Run Through.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공연처럼 연습하는 것)가 번갈아 가며 진행됐다. 공연 시간은 1시간 남짓. 등장 인물은 단 두 명, 아버지(이호재)와 아들(권해효)이다. 그런데 둘 사이의 대화는 무슨 선문답 같다. 5장으로 구성된 연극에서 아버지는 장마다 말을 바꾼다. 무엇이 진실인지, 인위적인 실수인지 혹은 의도된 조작인지 헷갈린다. 아들의 캐릭터도 좀체 잘 파악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똑같은 인물이 아닌 오리지널, 복제, 또 다른 복제의 세 인물을 넘나들기 때문. 이성열 연출가는 "무대엔 '한 인물 세 복제'의 아들 세 명만 등장하지만 대본상엔 무려 20명의 복제된 아들이 있다"고 귀띔했다.

자기가 복제된 것을 알게돼 혼란에 빠진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이참에 한몫 단단히 챙길 참이다. "널 복제한 거야,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 놈이 불법으로" "일인당 5억은 받을 수 있어. 그놈들이 한 짓 때문에 너의 고유함이 훼손됐잖아. 정체성이 위축되고." 인간에 대한 성찰은 없이 과학 기술 발전에만 열광하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 묘하게 겹쳐지는 대목들이다.

#황우석 박사가 본다면…

현재 대학로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내로라하는 스태프가 참여한 것도 화제. 연출은 지난해 올해의 예술상(그린벤치)을 수상한 이성열, 무대 미술은 올해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박동우,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조명 김창기, 번뜩이는 천재 음악가 장영규 등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다.

작품의 원작자는 여성 작가 카릴 처칠.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롤드 핀터와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희곡 작가로 꼽힌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한다. 제작사인 극단 컬티즌의 정혜영 대표는 "지난해 여름부터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우석 신화'에 휩싸였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괜히 발목 잡는다는 얘기 들을까봐 못했다"고 말했다. 황우석 박사가 실제로 이 작품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다. 18일부터 설치극장 정미소. 02-765-5475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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