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37. 구룡포 머슴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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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구룡포 머슴 생활 1년 뒤 정착했던 철원 노나메기농장에서의 필자.(맨 오른쪽)

지금도 내 마음에는 심훈의'상록수'가 어른댄다. 19세기 덴마크 황무지를 개척했던 지도자 그룬드비와 달가스 역시 내 삶의 영원한 이상이다. 조국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외쳤던 나무심기 운동의 주인공들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한 1972년 초 나는 경북 영일만의 한 시골을 찾으며 그들을 떠올렸다. 그게 백기완이 심어준 것인지, 내 스스로 깨친 것인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시골 생활을 공동체 실험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마을은 영일 구룡포읍에서 6㎞ 들어간 벽촌. 아홉 가구가 전부인 마을은 전체가 초가삼간이었다. 세상 변화와 담 쌓은 그 동네에서 나는 20대 총각 안이만의 집에 얹혀살았다. 기억에 선하다. 방 두 칸의 초가 앞마당에는 대추나무.살구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토종꿀을 치던 그들…. 그곳과 맺은 인연은 우연이다.

'살롱 드 방'을 정리한 뒤 잠시 다니던 제약회사의 젊은 동료가 내 농사일 계획에 감동했다. 내처 함께 내려간 곳이 그의 고향인 구룡포다. 그의 이름조차 기억에 희미하지만 그 마을은 아직 생생하다.

'인생에서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는 생각으로 내려갔지만, 단칸방이 문제였다. 젊은 처녀와 동거 중이던 그는 밤마다 힘을 써댔다. "외양간 신세를 져야 하나"하며 고민할 때 만난 이웃이 안이만이다.

"서울에서 오신 손님요, 절 받으시소. 앞으로 성님으로 모시겠심더."

순박하기 그지없는 안이만은 나를 그런 시골 예법으로 맞았다. 나중에 강원도 철원 생활의 동지이자, 서대문형무소까지 함께 끌려갔던 그와는 호흡이 잘 맞았다. 한번은 읍내 장터에서 즉석 힘자랑 대회가 열렸다. 맨손으로 손잡이 부분을 잡고 리어카를 뒤집어보이는 경기다.

"지그 성님이시더. 불란서에서도 살던 그런 분이시더."

안이만의 등쌀에 리어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응차 힘을 쓰자 리어카가 바로 뒤집혔다. 와, 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사람 고기 많이 먹어 힘 좋다"는 수군거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 혼자 성공해 막걸리 한 통을 상으로 받았다.

"달력 속의 국회의원님보다 성님이 더 잘 생겼니더" 라고 말하던 안이만은 그곳을 찾아온 백기완 앞에서 내가 왜 설설 기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만큼 나는 그의 우상이었다. 하여간 나는 당시 땅 한 뙈기 없던 시골의 가난한 삶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깡보리밥에 된장.간장이 전부, 김치조차도 없는 밥상을 상상해 보셨는지.

개구리.산비둘기를 잡아도 다른 양념이 없어 된장에 찍어 먹어야 했다. 이불이 없어 겨울에도 옷을 껴입은 채 잤다. 잠을 자다 철퍼덕 소리에 뛰쳐나가면 지붕에서 떨어진 구렁이가 설설 기어다녔던 '전설의 고향'이다. 농사일을 익히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기회란 땅을 얻는 일이었다. 백기완과 나는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자는 합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유럽과 서울과 작별한 채 이상주의 꿈에 부푼 시절, 기회는 나를 찾아왔다. 내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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