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핵화 느긋하던 트럼프, 백악관 회의선 “진전 없다” 분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미 양국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북핵을 놓고 ‘공조’ 속 미묘한 입장 차를 보여줬다. 이날 한·미 외교장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을 대상으로 북핵 브리핑을 하며 공조를 과시했다. 유엔에선 주유엔 미국대사가 대장 역할을 맡는데 이날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선 데다 브리핑 장소도 안보리 회의장이 아닌 주유엔 한국대표부였다. 정부는 “한·미 외교장관이 이번 행사를 공동 개최한 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긴밀한 공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북·미 미묘한 신경전 #헤일리는 대북제재 유지 언급하며 #“우리 친구 중 일부 법 우회해 문제” #외교가 “한국 염두에 둔 발언 가능성” #정의용, 볼턴과 종전선언 논의한 듯

하지만 이를 계기로 오히려 제재를 둘러싼 묘한 속내 차이도 드러났다. 모든 행사가 끝난 뒤 각기 자국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자리에서였다.

폼페이오 장관과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 대사는 유엔본부에서 약식 기자회견을 열고 제재와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헤일리 대사는 “북한의 비핵화 행동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제재를 확실히 유지하며 전진할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 친구들 중 일부가 법을 우회하겠다고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북·미 간에 시작된 대화를 지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재를 느슨하지 않게 하는 일인데 어떤 나라들은 면제를 원하고, 어떤 나라들은 제재를 해제하자고 하며, 어떤 나라들은 그 이상을 원한다고 한다”면서다. 헤일리 대사는 이날 북한으로의 유류 반입 금지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들이 발생했다고 지적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공개 거론했다.

헤일리 대사가 이날 의례적 용어인 ‘일부 국가’ 대신에 굳이 ‘우리 친구들 중 일부’라고 표현한 것은 한국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외교가에선 나온다. 정부는 평창 겨울올림픽 때에 이어 최근에는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로부터 남북 간 군 통신선 복원을 위한 예외를 인정받았다.

폼페이오 장관도 “모든 제재 회피 행태를 엄중하게 단속해야 한다”며 안보리 결의가 전면 금지한 북한의 해상 석탄 밀수를 예로 들었다. 이와 관련,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 전문가패널은 지난해 10월 제3국 선박 2척이 러시아산으로 속인 북한산 석탄을 한국에 유입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한국 당국은 증거 부족으로 해당 선박들을 억류하지 않았고, 이 배들은 한국 영해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

한국도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고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행사 뒤 뉴욕 주재 특파원단과의 간담회에서 “우리는 남북 간 판문점 선언 후속 조치로 (제재)예외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 대화와 협력을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제재 틀 안에서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면서다.

트럼프. [UPI=연합뉴스]

트럼프. [UPI=연합뉴스]

이날 안보리 브리핑에 앞서 열린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고 한다. 강경화 장관이 ‘판문점 선언의 원활한 이행을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는데, 여기엔 제재 면제 문제도 포함됐다는 것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와 미국의 독자 제재로 촘촘하게 상호 보완된 대북제재망은 대북 재화, 서비스, 용역 공급을 사실상 모두 차단하고 있다. 따라서 철도 연결 협의 등 남북 간의 협력이 계속 진행되려면 건마다 미국의 제재 면제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북한이 구체적 비핵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요청하는 대북제재 해제를 미국이 계속 받아줄지 여부가 관건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제재 해제와 비핵화 압박을 위한 제재 유지 사이에서 한·미 간 틈이 생길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선 비핵화 문제에서 쉽사리 진전을 보지 못하는 데 조바심을 내는 분위기도 포착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1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매일 보좌관에게 북핵 진전 상황을 확인하지만 진척이 없다는 데 좌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P는 백악관 보좌진 6명과 국무부 관리, 외교관들의 설명을 익명으로 전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주말 보좌관 회의에선 새로운 긍정적인 진전이 전혀 없다는 점에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자신이 공언했던 한국전 실종 미군 유해 200여 구 송환과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 파괴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교착 국면을 종전 선언 카드로 돌파하려는 모양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0일 워싱턴을 방문해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두 시간 동안 만난 것도 이런 타협점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북·미 간에 합의만 되면 9월 뉴욕 유엔총회가 남·북·미 3자 종전 선언을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라며 “우리로선 연내 종전 선언을 한다는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해 북·미가 타협점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9월 유엔총회를 계기로 한 종전 선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20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희망은 언젠가 북한이 왕따(pariah)가 아닌 친구로서 이곳 유엔에서 우리 가운데에 서는 것”이라며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가 의제로 다뤄지지 않는 유엔 안보리 회의를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 행정부 내에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 없이 섣불리 종전 선언을 하는 데 대한 부정적 기류가 팽배해 있다고 한다.

종전 선언 등을 두고 미국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북한은 연일 한국을 향해 ‘너나 잘하세요’ 식의 비난을 이어갔다. 노동신문은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싱가포르 렉처 발언을 두고 “제 처지도 모르는 희떠운 훈시”라고 비난한 데 이어 21일에는 집단 탈북 여종업원 사건의 진상 규명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22일에는 “남조선에서 경제파국과 실업사태는 그대로 민생파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공격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