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장된 농민의 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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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 농림수산위의 「수입변질 쇠고기 불법매장 진상조사위원회」는 17일 오후 충남 서산농장(축협 한우개량사업소)에 내려가 포클레인을 동원해 지난 84년 수입 변질쇠고기 3백95t을 매장한 현장을 발굴했다.
포클레인이 흙과 콘크리트를 부숴 내며 2∼3m들 파내러 가자 검게 변한 고기와 더러는 아직도 냉동된 채 생생한 모습의 포장육도 나왔다.
그러나『소도 묻혔을 것』이란 의원들의 기대는 어긋났고 「불법」의 냄새는 품기지 않았다.
현장에서 가진 증인신문에서도 전·현직 축산국장으로부터 『가축 전염병예방법과 동물검역소의 지시에 의해 적법절차에 따랐다』는 증언을 들었을 뿐이다.
의원들은 「증거물」이라며 발굴한 냉동쇠고기 20kg을 서울로 운반해 왔으나 뭔가 미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83년 한 마리에 1백8만원 하던 송아지가 2년 키운 뒤엔 93만원 선으로 폭락했던 수입 파동. 대량 수입한 쇠고기 중 4백t 가까운 양을 파묻기까지 했다는데 대한국민의 분노는 「적법절차」 앞에 풀 길이 없어 보였다. 현장의 증인신문과정에서 의원들은 『쇠고기를 파묻으며 농민의 아픔을 생각해 보았는가』라고 물었지만 당시 농민들이 겪었던 아픔은 그대로 암장돼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다.
상경한 의원들은 이날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농림수산부에서 변질쇠고기 수입경위에 대한 문서검증을 벌였으나 82년 농림수산부로부터 축협계획량보다 9천t 더 들여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당시 농림수산장관 등을 다시 증인으로 불러 신문한다. 세상이 다 아는 소 2만 마리 추가도입 경위에 대해 또 한번의 정치적 추궁과 공세가 되풀이될 것이다.
해묵은 소 파동이 5년여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진상 조사위까지 구성해 추궁 받는 모습에서 불신의 높은 벽만 실감될 뿐이다. 그리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쌓여진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한 농민들의 한은 앙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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