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서울 구치소에는 얼마 전까지 교도관들의 부조리를 막기 위해 신고함을 설치해놓고 재소자나 면회 가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실을 양심적으로 신고하는 교도관을 뽑아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다.
82년 이 신고함을 통해 가장 양심적이고 모범 교도관으로 뽑힌 교도관은 당시 민원실장으로 재소자 접견을 담당하던 유모 교사 (46)였다.
업무가 사소한 분야인 때문인지 큰 신고 액수는 없었으나 신고 건수가 워낙 많아 다른 교도관과는 경쟁이 안될 정도였다. 그는 이의 없이 그 해의 가장 모범적인 교도관으로 뽑혔다.
교도소 뒤편 현저동 관사에 살면서 어렵게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가정형편으로도 그의 청빈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모범 교도관으로 뽑힌 지 불과 이틀 후 그는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됐다.
죄명은 뇌물수수였다. 밀수범을 잡아 조사하던 중 유 교도관이 재소자와의 연락을 도맡아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었다. 수사 결과 그는 작은 뇌물은 신고해 표창을 받고 큰 뇌물은 삼켜버리며 비번 날 재소자 편지를 들고 가족들에게 전해주는 비둘기 통신을 도맡아 온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이번 탈주사건에서도 성동 구치소 임제이 교도관 (28)이 탈주 범 중 김동연이 그려준 보물지도를 들고 4번이나 우이동 야산을 찾아가 구덩이를 팠던 것으로 밝혀져 교도소내의 비리가 여전하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교도관들의 비리는 교도소라는 특수한 폐쇄사회에서 온갖 통제 상태의 재소자를 다룬다는 업무 때문에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또 교도소나 구치소 안에 있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알려질 뿐 외부 세계에는 쉽게 발각되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에 교도관들이 유혹에 넘어가기 일쑤다.
이 때문에 구치소나 교도소에 들어가 본 사람은 돈의 위력을 몸으로 실감한다.
재소자들 사이에는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고 돈 없으면 남의 고생까지 떠맡아 해야한다" 는 말이 체험을 통해 퍼져있다.
탈주 범 중 생포된 강영일이 인질극을 벌이며 도망 다니는 동안 동생 앞으로 쓴 유서 비슷한 편지에 "나는 무식해서 한자는 잘 모르지만 유전 무죄 무전 유죄에 큰 불만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입증하는 셈이다.
또 지난 5월 춘천 교도소 일부 재소자들이 교도소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할 때 "영치금을 갈취하는 교도관을 처벌해달라" 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치금은 예로부터 교도소 내 비리의 온상으로 가장 고질적인 문제다.
가족·친지가 특정 재소자를 위해 서무과를 통해 맡기는 영치금은 그 재소자가 희망하는 대로 사식이나 간단한 의류·약품 등 필수품을 구입할 때 쓰도록 하는 돈이다. 그러나 이 영치금이 때로는 재소자에게 금지된 술이나 담배를 구입하는데 쓰이는가하면 노역장의 고된 일을 면제해주거나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둔갑시켜 편히 누워지낼 수 있게 만드는 요술방망이 역할을 한다는 것.
재소자 1인당 영치금 한도액은 10만원이고 하루 사용 한도액은 2만원. 개인별로 통장을 만들어 관리해 재소자가 현금을 만질 기회는 없지만 교도관을 통해 영치금 사용 희망을 밝혀야 하므로 이 과정에서 뇌물로 바뀌게 된다.
재소자가 줄 뜻만 있으면 옷이나 약을 사는 것처럼 꾸미거나 실체보다 높게 값을 매기고 차액을 교도관이 차지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수법.
영치금이 없는 재소자는 수용 감방에서부터 차별 대우를 받기 십상이다. 돈이 많은 경제 사범이나 화이트칼라 범죄자는 「범털방」에 모이고 면회자가 드물고 형편이 어려운 흉악범·잡 범들은 「개털방」에 수용한다는 게 재소자들의 주장이다.
지난해 부정수표 단속법 (당좌수표 부도)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회사 대표 김모씨 (54) 의 경우 처음에는 이런 사정을 잘 모르고 잡 범 속에 섞여 곤욕을 치르다 가족 앞으로 "이 편지를 갖고 가는 교도관에게 20만원을 주라는 비둘기 통신을 보낸 후 방을 옮길 수 있었다" 고 했다.
김씨는 무엇보다 「범털방」은 재소자들이 점잖은데다 환기가 잘되고 볕이 들 때도 있어 악취가 나지 않아 지낼 만 하더라는 것. 또 「범털방」은 재소자들이 돌아가며 부담하는 회식이 잦고 방안에서의 행동이 자유로운 반면 「개털방」은 교도관들로부터 거친 욕설을 듣기 일쑤이며 함부로 눕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부산 형제 유치원장 박인근 씨가 구속 기소된 후 경찰서 대용 감방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통원 치료 명목으로 울산시내 목욕탕·여관이나 집에까지 자유롭게 드나든 것도 바로 돈의 위력이었다.
교도소 내의 금품비리 근절은 교정 행정 쇄신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
교도관 처우 개선에 앞장서 현재 교도관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김석휘 변호사 (전 법무부장관) 는 79년 교정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자체 비리조사를 벌여 2백여 명의 교도관을 한꺼번에 면직시킨 후 교도소 매점 이익금을 교도관 복지 기금으로 바꾸는 등 체질개선을 시도했었다.
이번 탈주 범 난동 사건을 교훈 삼아 법무부가 교정행정을 혁신해야함은 물론이고 교도관들도 뼈저린 반성과 새로 태어난다는 굳은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게 온 국민의 바람이다.

<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