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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오만, 유권자의 편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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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느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학부모 강좌에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다. 강연장에 가보니 시작 전에 구청장의 인사말 순서가 갑자기 추가돼 있었다. 예정 시간보다 10분쯤 지나 구청장이 도착해 단상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는 인사말이 아니라 일종의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강연 주제와 관련해 자기의 생각을 한참 늘어놓더니 구청장으로서 그동안 지역에서 이룬 치적에 대해 장황하게 떠벌렸다. 시간은 어느덧 20분이나 흘렀고, 강연을 들으러온 주부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짜증의 수준을 넘어 화가 나고 맥이 빠졌다. 내 '순서'가 돼 강단에 올랐지만, 정말로 강의할 기분이 아니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나서야 힘겹게 본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종종 벌어진다. 심포지엄 같은 행사를 할 경우 단체장.국회의원.구의원.시의원.관련 단체 회장 등 지체 높으신 분들의 축사와 인사말로 30분 정도가 훌쩍 흘러가버리기 일쑤다. 주최 측에서는 그들의 발언 순서와 앉는 자리의 배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비서실을 통해 서로 앞쪽에 배치해 달라는 요청 또는 압력이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요란을 떨게 해놓은 당사자들은 본 행사가 시작되면 자리를 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포지엄의 첫 발표자가 막 말문을 열었는데, 수행원들과 함께 우르르 행사장을 나가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공연장에서 막이 올랐는데 그렇게 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완전히 망가뜨린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고위직 인사들의 품위와 체면을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 자신이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과시하고 확인시키는 데 골몰하는 이들에게 권력은 그 자체로 지상의 목적이 된다. 선거철에는 머리를 깊숙이 조아려 유권자들에게 큰절을 올리지만, 당선되고 나면 알량한 특권의식으로 시민들을 업신여긴다. 그 오만한 모습을 보면서 유권자들의 편견은 점점 굳어진다. 정치인은 모두 권력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다. 물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인들의 탓이다. 하지만 사람을 제대로 뽑지 못한 유권자의 책임도 있다. 따라서 오만과 편견의 악순환을 깨는 것도 공동의 몫이다.

정책의 연구와 집행보다는 각종 행사장에 얼굴을 내비치고 축사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당선되는 것은 정치 판이 왜곡됐기 때문이다.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데도 엄청난 권력을 위임받는 불공정한 교환, 그 허세의 시장은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먹고 자라난다. 정치의 세계는 어쩔 수 없다는 고상한 패배주의에 유권자들이 빠져드는 틈에서 불온한 정치인들은 일부 유권자들과 패거리를 이뤄 득표하는 것이다. 결탁과 야합의 밀실 정치가 지방자치에서도 세를 확대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을 질식시킨다.

다시금 정치의 계절이 왔다. 수많은 홍보물과 캠페인이 쏟아질 것이다. 연출된 사진과 겉치레 수사(修辭)와 선정적인 퍼포먼스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안적인 소통의 회로를 작동시켜야 한다. 정책의 실질과 그 수행 능력을 꼼꼼히 따져보는 움직임은 그 한 가지 양식이 된다. 그와 함께 우리는 탐욕과 두려움 또는 경멸감으로 가득 차 있는 정치적 무의식에서 해탈해야 한다. 권력의 원천을 시민들의 상식과 생활 감각으로 복귀시킬 때 정치인의 오만과 유권자의 편견은 극복될 수 있다. 선거를 '그들만의 잔치'로 방임하지 않고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그리는 모두의 축제로 만드는 길이 거기에 있다.

김찬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