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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에로 배우 사쿠라 마나, 누가 최저라고 욕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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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일본의 에로 배우 사쿠라 마나. 1993년생으로 키사라즈 공고 토목과를 졸업한 후 2012년 AV를 찍었다. 에세이집과 소설책을 냈다.

일본의 에로 배우 사쿠라 마나. 1993년생으로 키사라즈 공고 토목과를 졸업한 후 2012년 AV를 찍었다. 에세이집과 소설책을 냈다.

[김봉석의 B급 서재] AV 소설 『최저』    

지난 12일 개막한 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한 일본영화 '최저'는 AV(성인 비디오) 업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홋카이도에서 도쿄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배우가 된 아야노,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충동적으로 AV를 찍은 미호, AV에 출연했던 어머니 때문에 곤란해 하는 여고생 아야코. '최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제제 다카히사 감독이 말하는 '최저'의 그녀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일하고, 살아간다. 사람들이 흔히 ‘최저’라고 비난하는, 몸을 파는 AV 배우인 그들의 고민은 보통의 여성과 과연 다른 것일까.

'최저'를 처음 본 곳은 작년 10월의 도쿄영화제. 감독은 핑크영화로 데뷔하여 한때 핑크 4천왕으로 불리다가 메이저로 진출한 제제 다카히사, 원작 소설의 작가는 현역 AV 배우인 사쿠라 마나였다. 감독과 작가 모두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좋아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에로영화인 핑크영화들도, 재작년 일본의 흥행작인 경찰영화 '64'도, 작년 부천영화제에 초청했던 '랜덤 라이브'도 모두 좋았다. 제제 다카히사는 메이저 감독이 된 후에도, 개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은 영화들을 틈틈이 만들어온 감독이다.

1993년생인 사쿠라 마나는 특이한 이력 덕분에 기억을 하고 있었다. 5년제인 공업고등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성인이 된 2012년 AV에 출연했고, 재학 당시 취득한 토목자격증은 원래 있었고 배우를 하면서 보일러 기사 자격증도 따고, 2014년 자전 에세이 『사쿠라 마나, 18살에 AV 배우를 선언하다』(레진코믹스)를 쓰고, 2016년에는 소설 『최저』를 출간해 작가가 되었다. 두 번째 소설이자 첫 장편인 『요철』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앞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쿠라 마나의 소설이 언제쯤 국내에 번역될까 기다리고 있다가, 영화 '최저'를 먼저 보게 되었다.

AV 배우들의 실태를 담은 소설 『최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최근 국내에도 소개됐다.

AV 배우들의 실태를 담은 소설 『최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최근 국내에도 소개됐다.

최근 출간된 소설 『최저』(냉수)는 흥미진진했다. 영화를 봤기에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소설은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모모코를 포함한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 구성이다. 취재를 통해서 AV 업계의 풍성한 이야기와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최저』를 읽다 보면 경험의 힘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사건도, 감정도 가상, 상상의 모험을 통해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상상력의 힘은 때로 무한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직접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리얼함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양감이 느껴진다. 작가가 되기 위한 단련이 없었던 사쿠라 마나의『최저』는 한편 미숙하지만 그것을 상회하는 리얼리티의 생생한 질감 덕분에 읽는 재미가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진솔하고 가슴 아리다.

영화로 본 '최저'와 소설로 읽는 『최저』. 제제 다카히사의 각색은 대단히 훌륭했다. 세 여성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며 다양한 관계를 부여한다. 고통을 겪는 그녀들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사쿠라 마나의 소설은 단지 자기 고백이나 실태를 그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 후기에서 사쿠라는 말한다. "AV 배우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를 견딘다'는 행위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누군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AV를, AV 배우를 최저라고 부른다. 인간으로서 최저, 사회에서 최저. 모든 것이 부서지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사쿠라 마나의 다짐이 『최저』에서 선연하게 드러난다. '최저'를 보고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경험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수많은 발견이 가능한지. 다양한 경험에서 나온 다양한 소설을 더 많이 읽고 싶다.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naver.com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등. 영화·만화 등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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