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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시간표 접은 트럼프···"시간·속도 제한 없다"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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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백악관에서 "북한의 비핵화에는 시한이 없다. 서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백악관에서 "북한의 비핵화에는 시한이 없다. 서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AP=연합뉴스]

 북한 비핵화 시간표를 놓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물러서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북한의 비핵화에 시한과 속도 제한은 없다”고 선언했다. 당초 북ㆍ미 접촉의 전제로 간주됐던 빠른 비핵화와 비핵화 시간표로 더 이상 북한을 압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에 얽매여 비핵화 시간표를 뒤로 미뤘다는 우려가 태평양을 사이에 놓고 한ㆍ미 양쪽에서 나오고 있다.

유해송환·실무협상 시간끄는 북한 눈치보기 #수미 테리 "북, 초박막 살라미전술 수년 끌 것" #비핵화ㆍ종전선언 동시 추진도 의회가 반대, #11월 미 중간선거까지 협상만 하는 교착상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북한과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매우 잘 되고 있다”며 “우리가 속도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재는 유지되고 있고 인질들은 송환됐으며 9개월동안 로켓 발사도 없었다”며 “북한과 관계가 매우 좋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시간의 제한, 속도 제한이 없다”며 “우리는 단지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이는 전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비핵화 협상을 놓고 “우리에겐 시간이 있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수년 동안 진행돼 온 일”이라고 했던 것에서 ‘비핵화는 시간 제한이 없는 과정’으로 더욱 물러선 듯한 발언이다.
당초 백악관은 이렇지 않았다. 강경파였던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달 1일 북핵,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프로그램과 관련 “1년내 폐기할 방안을 고안했다”고 단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곧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 백악관이 대북 협상을 위해 비핵화 속도전의 압박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관측이 다수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잇따라 비핵화 시간표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내놓으며 사실상 비핵화는 속도전이 아니라 북ㆍ미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참호전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백악관이 급격하게 입장 변화를 보인 것은 북한의 핵 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현실을 파악했거나,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내 정치를 의식해 업적 관리에 나설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을 앞두고 북한을 의식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문제는 한때 최고의 압박을 통한 비핵화 전략을 고수했던 미국이 이번에는 정반대로 ‘시간 제한이 없는 비핵화’를 거론하면서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말려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연구원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연구원

영국의 가디언은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약속인 미군 유해 55구를 다음 주에 넘겨받는 대신 비핵화의 데드라인이 없다고 양보해 빠른 비핵화 압박을 완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인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도 “유해 송환은 허울뿐인 양보”라며 “실제 비핵화를 놓고 북한은 아주 얇게 자르는 초박막 살라미 전술을 통해 최소한만 양보하며 시간을 벌어 수년을 끌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까지 하고 중국은 국경에서 제재를 완화하는 상황에서 작년 같은 최고 수준의 최대한 압박으로 되돌아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전성훈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처음부터 스텝이 꼬였다. 북한이 얘기하는 비핵화와 미국이 얘기하는 비핵화는 다른데 접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북ㆍ미 입장이 평행선으로 가고 있다”며 “미국 정부는 최소 중간선거까지 군불을 때며 분위기를 끌고 나가려다 보니 본말이 전도되고 북한도 유해송환이나 미사일 엔진시험장 폐기 등 지엽적인 선물로만 호응하려 한다”고 말했다.

밥 메넨데스 미 상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간사가 12일 워싱턴에 상원 본관 앞에서 한인 풀뿌리대회 참가자들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JTBC 이광조 촬영기자]

밥 메넨데스 미 상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간사가 12일 워싱턴에 상원 본관 앞에서 한인 풀뿌리대회 참가자들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JTBC 이광조 촬영기자]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협상을 놓곤 미국 의회에서도 불만이 나오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6∼7일 세번째 방북 이후 대북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대신 비핵화와 안전보장ㆍ관계개선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밥 메넨데스 미 상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는 이에 대해“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있느냐”며 “주권국가인 한국이 자기 결정권한을 갖고 있지만 누군가 총구를 내게 겨누고 있다면 그건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비핵화에 상응하는 안전보장의 방법인 종전선언을 일축한 것이다.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종전선언 이후의 단계인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을 놓고 ‘주한미군 노 터치’를 촉구했다. 그는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한 김정은 압박에서 무슨 수단이든 사용하는 동시에 한반도 평화와 안보를 위해 상당한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서울=박유미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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