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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화가와 문인 책 표지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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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책과 만나 얻는 첫 인상은 표지에서 온다. 표지는 책의 얼굴이요, 격을 드러내는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책의 겉모습을 만드는 장정(裝幀) 또는 북디자인(Book Design)은 그 시대가 일군 문화와 정신의 깊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표식으로 중요하다.

요즈음은 전문 장정가(북디자이너)가 주로 책을 설계하고 꾸미지만 한국 근대 장정사를 들춰보면 화가들이 표지 디자인을 맡아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작품을 남긴 경우가 많다.

한국 최초의 양화가로 꼽히는 고희동(1886~1965)은 육당 최남선이 1926년에 펴낸 지리산 수필기행문집인 '심춘순례'의 표지를 그렸고, 화가 김환기(1913~74)는 김동리.계용묵.박종화.염상섭.이태준의 단편소설을 모은 48년판 '해방문학선집'을 그 특유의 백자 달항아리로 꾸몄다.

근원 김용준.정현웅.길진섭.배운성.운보 김기창.변종하 등 20세기 전반기에 화단을 누빈 작가들은 또한 문단과 교유하며 한 폭의 그림을 책에 수놓은 장정가들이었다.

25일께 서점에 나올 '프로이트 전집'(열린책들 펴냄) 신판은 맥이 끊겼던 화가의 장정 작업을 되살려 화단과 출판계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 잊힌 전통을 이은 이는 화가 고낙범(43)씨다. 15권 짜리 전집 표지에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초상을 15가지 단색조 프리즘으로 그렸다. 인간을 움직이는 주인을 이성이 아닌 욕망과 꿈과 무의식이라 파헤쳤던 프로이트의 얼굴이 카멜레온처럼 표지에 가볍게 떠 있다.

고씨가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한 프로이트의 인물화는 '20세기 최대의 정신'이자 '욕망의 언어를 해독한 사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독자는 인간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억압된 욕망으로 풀어헤친 프로이트의 혁명적인 사유를 화가의 그림으로 먼저 읽는다. 의식의 껍데기 아래 웅크린 무의식의 알길 없는 세계가 푸르고 붉은 색채 밑에서 피어오른다.

지난 여섯 달 동안 꼬박 프로이트 초상 제작에 매달려온 고씨는 "몇몇 사람만이 즐기는 전시장 미술보다 다수의 대중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출판미술의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색채와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해온 고씨는 "프로이트야말로 내 작업에 맞춤한 주제였다"며 장정 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고씨는 이 유화 연작과 책을 묶어 내년에 열 개인전에 설치미술로 확장할 예정이어서 출판과 미술이 서로에게 다리를 놓은 셈이 됐다.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는 "화가와 문인들이 뜻과 마음을 나누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창작의 열매를 함께 갈무리하는 전통을 살리고 싶었다"며 "앞으로도 좋은 책 장정을 위해 미술인들과 함께 작업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02-738-734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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