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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말 유럽에서 제일 가는 한량이었다. 명예와 돈과 멋에서 모자라는 것이 없었다. 그 「와일드」 가 남색가라는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다. 27세의 나이에 귀족가문의 미소년을 데리고 여행을 다닌것이 화근이었다. 소년의 부친으로 부터고소를 당한 것이다. 재판관은 2년 징역의 유죄와 파산선고를 내렸다.「와일드」 의 명작으로 꼽히는 『심연에서』 라는 작품은 바로 그 시절의 옥중기였다. 그 속에 이런 문구가 있다.
『나는 나의 행위를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편지속에서 나는여러차례 옥중에서의 나의 정신적인 발전, 내 일신에 떨어진 생활에 대한 나의 성걱과 지적 태도의 필연적 진화등에 관해 언급했다.』
문제의 미소년 「더글러스」 에게보내는 편지형식의 이 옥중기는참회록이었다. 출옥할때 그는 결코 인생의 패배자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심신에 새로운 삶(vita nouva)을 느끼며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에 넘쳐 었었다.
그가 만일 옥중기를 집필할수없었다면 그는 원망과 증오에 불타는 복수심을 안고 감옥을 나섰을 것이다.
『단 하나라도 아름다운 작품을세상에 내놓을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악의있는 자로부터 그 독을빼앗고, 비겁한자로부터그 비웃음을 빼앗고 모욕의 혀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와일드」 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그는 가톨릭의 수도원으로 들어갈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와일드」 는 두 손을 얼굴에 대고 울었다.
물론 감옥엔 「와일드」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감옥에들어가 앉으면 아무리 마음이 사악한 사람도 느끼는 일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천하의 문필가는 아니라도 무언가 자신의 심경을 적어보고 싶은 충동도 느낄 것이다. 그야말로자신의 가장진실한 고백이요, 참회일 수도있다.
우리나라교도소는 무슨 까닭인지 그 안에서책도 마음대로 못읽고 글도 쓸수없게 했다. 참회를 하려고 해도 면벽으로나 할까, 다른 일을 못하게했다. 뒤늦게 법무당국은 재소자들에게 집필과 독서, 신문구독등을 허용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제야비로소 교도소에도 햇볕이 드는것인가. 바늘 구멍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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