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 마당」의연한 주인 노릇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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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직도 권투장의 그 해프닝은 여운이 길다. 세계는 물론 국내 여론도 비등했다. 잘돼 가는 잔치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평생 처음으로 권투장에 직접 가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면서 스탠드에서, 복도에서 많은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고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도 의외였다.
욕은 커녕 한판 잘했다는 것이었다. 온몸에 배지를 달고있는 어느 노신사는『한국인이기에 그만큼 하고 참았지 성질 급한 나라에서였다면 총으로 쐈을 것이다. 아주 박살을 내야 하는건데…』하고 말했다. 그는 아까운 표정이었다.
그 노신사는 사례를 들어가며 억울한 판정을 나에게 호소했다. 그는 국제 권투연맹의「마피아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젠 섣불리 못 할거예요. 문제의 심판을 자격정지 시킨걸 보세요. 가슴이 뜨끔했을 겁니다.』
중남미에서 온 트레이닝 복장의 청년도 같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터져야 할 일을 한국에서 잘 해줬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이나 강력히 항의할 수 있는 한국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많이 참았지요. 잘 터뜨렸습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여하튼 그 심판이 불을 잘 질렀다는 것이다. 그런 심판을 할 수 있었던 권투장의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쾌거」라는 것이었다. 감히 그 아성에 도전했다는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이었다. 항의가 좀 길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보다 합리적인 방법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 아닌 스탠드의 분위기는 내가 들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결론은 언젠가 터졌어야 할 일을 한국이 해줬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문제의 핵심이 미국에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미국 NBC만이 경기장에서 인터뷰하는 코너를 갖고 있는 것부터 횡포라는 지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탠드의 분위기는 그 사건을「의거」인양 박수하고 있는데 반해 NBC와 일본방송만이 유독「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거와 폭동, 이런 시각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우리 국민들도 처음엔 놀랐다. 분통은 끓었지만 그래도 주인된 체면에 참아야 했었다. 해서 모든 국민은 문제의 임원진을 규탄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메달 하나에 마치 국운이 걸린 듯 법식을 떤 사람은 누구며, 지나친 승부욕을 부추긴 사람은 또 누구인가. 협상합줄 모르는 극한성, 앞뒤 볼 줄 모르는 조급한 우리기질, 도대체 한국인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손님 앞에 얼굴을 들수 없었다.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이었다. 이것이 한국의 양식이었다. 한데, NBC가 계속 우리 비위를 긁으면서 민심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차츰 반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이야기는 더 하지도 말자. 왜 미국이 이럴까. 무슨 저의가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보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한국언론도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방송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기자의 붓끝에 묘한 가시가 돋아있는 어제 오늘이다. 이윽고 집권 여당에서조차 NBC를 문제삼기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 미국 수영선수들의 몰지각한 사건이 터졌다. 기다리기라도 한듯 국내 매스컴이 들고 일어났다. 「절도」라는 표제를 붙여서 노골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왜들 이러나. 이것은 안된다.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NBC가 미국의 양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대승적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그간 우리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혀를 깨물고서라도 참아야 했던 우리였다.
우리에겐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던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깔린 이런 앙금을 이젠 풀어야한다. 비굴하게 참는게 아니고 한국적인 양식으로 포용하자는 것이다. 6·25전쟁, KAL기 승객 참사사건, 그 피맺힌 한을 간직한 채 세계인류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지 않은가. 속도 없느냐고 빗대는 외국인도 있다.
우리는 화합의 마당에서 주인이다. 동서가교의 장을 만들고 있다. 의젓하고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그만큼 자랐다. 미국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은근히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누가 뭐라던 신경쓸것 없다. 피로 맺은 한미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럴 수 없도록 노력해야한다. 두 나라 매스컴 당사자는 물론 냉정을 되찾아주기 바란다. 복싱한판에 국민감정까지 자극돼서야 서로의 체면이 아니다. 의거이든 폭거이건 사건은 끝났다. 깨끗이 마무리지어 세계인의 한마당에 우리 다시 손잡고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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