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라디오 스타'의 마지막 멘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1호 32면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저자: 김광한 출판사: 북레시피 가격: 1만6000원

저자: 김광한 출판사: 북레시피 가격: 1만6000원

‘위로와 힐링이 되는 음식이 소울 푸드라면, 같은 맥락에서 소울 뮤직도 있겠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희로애락의 그 찰나에 들었던(혹은 들려왔던) 노래 한 곡은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을 다스리는 안식의 매개체가 된다.

과거엔 라디오가 소울 뮤직을 얻는 주요 통로였다. 마치 내 심정을 모두 알아주는듯한 가사의 노래, 여기에 얹어지는 DJ의 한마디에 울고 웃었다.

하여 당신이 스마트폰 대신 라디오를 끼고 자란 중장년층이라면, 이 사람을 잊을 리 없다. 1980~90년대를 주름 잡은 팝송 전문 DJ 겸 팝 칼럼니스트 김광한(1946~2015)이다. 3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도 그는 라디오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이라고 쓰인 책 표지를 보자마자 집어 든 것도 이런 기억 때문이리라. 특히 ‘팝스 다이얼’은 그를 대신하는 하나의 단어라 해도 무방하다. 80년대부터 KBS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11년간 진행한 그는 당시 MBC 라디오의 김기덕과 함께 양대 DJ로 손꼽히며 국내 팝 음악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입담 넘치는 진행 솜씨, 팝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청취자들 사이에선 아이돌 못지않은 ‘오빠’였던 존재, 말하자면 진짜 ‘라디오 스타’가 바로 그였다. 물론 80년대 후반엔 KBS 2TV ‘쇼 비디오자키’ MC를 맡으며 얼굴까지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책이, 그것도 자서전이 그가 세상을 뜬지 3년 만에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부인 최경순 여사는 그의 사무실을 그가 떠난 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리하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먼지가 켜켜이 쌓인 LP판 더미와 그득한 팝송 관련 책들 사이에 정체 모를 원고 더미가 숨어 있었다. 바로 고인이 스스로 써 내려 간 삶의 궤적이었다.

드라마 같은 우연으로 나온 책은 내용 역시 드라마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그는 DJ가 되기까지 매 순간 삶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서울 충무로 5층짜리 건물주의 아들이었다가 갈 곳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는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서라벌 예대를 다니던 열아홉에 DJ가 되며 ‘국내 최연소 팝송전문 DJ’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것도 잠시, 방송국이 운영난에 문을 닫고 난 뒤에는 가정교사·간판장이·신문배달원·병아리장사까지 먹고 살기 위한 다양한 업을 전전한다. 그나마 입담은 타고난 것인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완이 좋아 매번 업으로 나서도 될만한 성공을 거두지만, 그는 번번이 궤도를 바로 잡는다. 바로 DJ라는 목표점을 향해서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당시 방송 DJ계의 독보적 존재인 박원웅이 진행한 MBC FM ‘박원웅과 함께’에 게스트로 나서면서 본격적인 마이크 인생이 재개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교과서 같은 이 문구가 책 시작 페이지에 그의 사인과 함께 적혀 있다. 그가 마이크 앞에서 못다 한 이야기도, 세상에 가장 들려주고 싶었던 말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소울 뮤직을 대신할 책 한 권을 남기면서 말이다. ●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