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DNA 정보만 있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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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정보 은행'이 있었더라면…."

서울 마포 일대에서 여자 초등생 4명을 성폭행한 이모(31)씨를 붙잡은 경찰관의 푸념이다. 성폭행범 전과자의 유전자 감식 정보 데이터베이스(DB)가 있었더라면 피해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씨의 첫 범행은 2004년 11월에 일어났다. 경찰은 당시 피해 여학생에게서 이씨의 유전자(DNA)를 채취했다. DNA를 이용한 유전자 지문감식이 틀릴 확률은 수천만분의 1에 불과하다. 경찰이 두 차례의 성폭행 전과를 갖고 있던 이씨의 DNA를 보관, 대조했더라면 쉽게 범인을 지목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세 건의 성폭행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DNA 정보를 수사에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전자 감식 정보의 수집 및 관리에 관한 법안'이 아직도 통과되지 못한 탓이다. 이 법안은 살인.강간 등 11개 범죄를 저지른 구속 피의자나 실형 수형자 등의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수사기관이 범죄 수사에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외국에선 이미 이런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인권을 주창하는 단체들의 반대로 법안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 이들은 오.남용 우려가 높고, 범죄 수사 이외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법안에 반대한다.

이 때문에 기껏 범죄 현장에서 어렵게 발견한 범인의 DNA는 대조할 대상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관된 성폭행범 DNA만 해도 800건이 넘는다고 한다. 한 법의학자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라고 말했다.

사회를 놀라게 하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법안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성범죄는 중독성이 강해 특히 재범률이 높은 편이다. 2004년 성폭행 범죄자 가운데 11.9%가, 지난해에는 16.1%가 다시 성폭행을 저질렀다.

서완석(신경정신과) 영남대병원 교수는 "성범죄자는 성욕이 아닌 심리적 열등감 등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다"고 진단한다. 유전자 정보 은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더 이상의 성범죄를 막기 위해선 말이다.

이철재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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