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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유산 혁신도시, 영남 5곳 보수 표심 흔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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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에 조성된 진주혁신도시는 공공기관 직원과 젊은층 유입이 늘면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높아졌다. [중앙포토]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에 조성된 진주혁신도시는 공공기관 직원과 젊은층 유입이 늘면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높아졌다. [중앙포토]

경남 진주시는 보수의 심장으로 불린다. 역대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승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6·13 지방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 조규일 후보가 52.1%의 득표율로 45.7%에 그친 더불어민주당 갈상돈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보수 토박이 대신 젊은 외지인 많아 #진주 혁신도시 들어선 충무공동선 #김경수 당선인 득표율 70% 달해 #김천·신서에서도 민주당이 앞서

하지만 진주혁신도시가 들어선 충무공동의 상황은 다르다. 민주당 갈 후보가 63.9%를 얻어 한국당 조 당선인(33.9%)을 더블 스코어 차로 제쳤다. 경남도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김경수 당선인은 충무공동에서 70.3%의 득표율을 보여 한국당 김태호 후보(25.1%)를 2.8배 앞질렀다. 충무공동은 한국당 천하였던 진주시에서 두드러진 민주당 지역이 됐다.

충무공동은 진주혁신도시 내 공공기관이 이주를 시작한 2013년 12월 생겼다. 출범 첫 해 486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11개 공공기관 이주와 아파트 건설로 1만7600여 명(5월 기준)으로 급증했다. 20~40대 비율이 절반을 차지하고 60세 이상은 1100여 명에 불과하다. 혁신도시 내 공공기관 직원 김모(46)씨는 “서울에서 내려온지 2~3년 밖에 되지 않은 젊은층이 많다보니 지역정서에서 자유로운 수도권 표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시장 선거 충무공동 득표 현황

경남 진주시장 선거 충무공동 득표 현황

‘노무현의 유산’ 혁신도시가 보수의 뿌리를 파고 들고 있다. 수도권 이주민과 지역 젊은층이 몰리면서 표심이 민주당으로 쏠리는 양상이 굳어지고 있다. 특히 영남에 조성된 혁신도시 5곳(대구·부산·울산·김천·진주)은 이 지역의 탈보수화를 이끌고 있다.

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7회 지방선거 결과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9곳이 민주당 시·도지사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한 곳은 무소속 원희룡 당선인을 지지한 제주혁신도시다. 한국당이 우세를 점한 곳은 없었다. 혁신도시 지지 후보와 광역단체장 당선인이 다른 지역은 대구·경북 두 곳이다. 대구 신서혁신도시(동구 안심3·4동)에선 민주당 임대윤 후보(46.2%)가 한국당 권영진 당선인(43.9%)을 제쳤다. 김천혁신도시에서도 민주당 오중기 후보(63.7%)가 한국당 이철우 당선인(23.4%)을 표차로 눌렀다. 보수색이 강한 대구·경북에서도 혁신도시가 진보의 거점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기초단체장 투표 경향도 비슷했다. 혁신도시는 독립된 자치단체가 아니다. 부산혁신도시는 남구 등 3개구에 걸쳐 있고, 충북혁신도시는 진천·음성 등 2개 군, 전북혁신도시는 전주시·완주군 경계에 조성됐다. 이 때문에 기초단체장을 뽑지 않는 제주도를 제외한 9개 혁신도시의 표심을 반영하는 기초단체장 선거구는 모두 13곳이다. 이 중 12곳이 민주당 후보를 더 지지했다.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경북 김천은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가장 많이 줬다. 광역단체장 선거와 마찬가지로 비한국당 투표 성향이 두드러졌다.

혁신도시 표심과 기초단체장 선거결과가 엇갈린 곳은 대구 신서혁신도시(안심3·4동)와 경남 진주혁신도시(충무공동)다. 대구 신서혁신도시는 대구 동구청장 선거에서 민주당 서재헌 후보에 39.2%의 지지를 보냈다. 동구 전체 지역에서 서 후보가 1위를 차지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한국가스공사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2년 전쯤 이곳으로 이사온 주부 김은주(39)씨는 “공공기관 종사자와 그 가족들은 대부분 대구 토박이가 아니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이 반성하지 않는 것 같아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안심3·4동이 동구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타지에서 온 젊은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5월 주민등록인구를 살펴보면 안심 3·4동은 30대가 19%, 40대가 18%를 차지한다. 50대는 13%, 60대는 9% 수준이다. 대조적으로 동구 원도심인 신암5동은 30대 10%, 40대 14%, 50대 19%, 60대 17%다. 채장수 경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혁신도시는 세종시처럼 젊은 연령대의 공무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아 기존 지역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민심을 나타낸다”며 “맹목적인 정당 투표가 아니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유권자가 많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에 위치한 진주혁신도시도 인구 1만명을 돌파한 2016년을 기점으로 민주당 지지세로 돌아섰다. 충무공동 주민들은 2012년 대선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2016년 총선(진주 갑)에서는 민주당 정영훈 후보(50.8%)를 지지했다. 19대 대선에서도 진주시 다른 지역과 달리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과반이 넘는 51.5%의 지지를 보냈다.

진주시 구도심에서 충무공동으로 이사를 온 이모(39)씨는 “이주민도 많지만 충무공동에 사는 주민 중엔 구도심에서 온 젊은 사람들이 많다”며 “다른 읍·면·동과 달리 선거 기간 민주당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지역 정서에서 자유로운 이주민 효과 뿐 아니라 지역 젊은층이 집결해 진보 성향이 강해지는 결집효과가 나타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김천과 진주 같은 중소도시에선 혁신도시 조성 뒤에도 전체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아 지역내 인구이동이 많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진재구 청주대 교수(행정학과)는 “혁신도시 주민은 이주 공공기관 직원과 좋은 환경을 찾아 온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둔 신혼부부들이 많다”며 “수도권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이주민 표심에 진보 성향의 지역 젊은층이 결합하면서 민주당 지지율이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혁신도시의 민주당 성향엔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실리적 측면도 작용했다. 혁신도시는 국토균형개발을 목표로 추진한 노무현 정부의 역점사업이다. 공사를 시작한 건 이명박 정권, 공공기관 이전 마무리는 박근혜 정권에서 이뤄졌다. 충북혁신도시 이해성(62) 주민자치위원장은 “신도시에 걸맞는 문화·체육 인프라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여건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불만이 크다”며 “‘혁신도시를 만든 노무현 정부를 잇는 문재인 정부가 혁신도시 완성에 힘을 쏟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 심리가 선거에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과)는 “중앙정부가 만든 도시인 혁신도시 유권자들이 중앙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후보에게 지지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진천·진주·대구·원주=최종권·위성욱·김정석·박진호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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