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도 고민 현대차도 고민 … 길었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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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9시55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국내 재계 서열 2위인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68.얼굴) 회장이 검은색 에쿠스를 타고 도착했다. 낭패감과 고뇌가 얼굴 표정에 드러나기도 했다. 검찰 조사는 19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으로 서울지검에 구속된 이후 28년 만이다. 정 회장은 기자들에게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말한 뒤 곧바로 청사 11층 특별조사실(1110호실)로 향했다.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나흘 전 18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던 곳이다. 정 회장에 대한 조사는 이날 오후 12시 넘어까지 진행됐다.

최재경 중수1과장.이동열 검사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조사가 시작됐다. 정 회장은 조사 도중 간간이 변호인을 접견하며 진술 방향을 상의했다. 수사팀의 추궁이 예상 밖으로 강도가 높았던 것이다. 정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는 것이 수사팀 내부 기류라고 한다.

하지만 정상명 총장 등 검찰 수뇌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브리핑에서 "검토하고 고심 중"이라는 채동욱 수사기획관의 잇따른 발언은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다. 검찰의 고심은 정 회장의 구속과 불구속 여부에 모인다. 현대차에 쏠리고 있는 비리 의혹의 정점에는 정 회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법적 잣대와 법적 엄격함을 고려하면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검찰 내부에 많다.

하지만 국가 경제에 미칠 파장을 무시할 수 없다. 39개의 계열사를 이끌며 지난해 85조원의 매출을 올렸던 기업 총수에 대한 구속은 대외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 회장의 구속이 현대차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독특한 기업문화도 검찰에는 부담이다. 검찰은 사법 정의와 경제 파장의 접합점을 놓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같은 날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는 짙게 드리워진 황사처럼 하루 종일 우울했다. 정 회장과 함께 김동진 부회장, 채양기 기획총괄본부 사장이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자 검찰의 수사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정 회장은 오너이지만 다른 그룹 총수와 달리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직접 내리는 최고경영자"라며 정 회장이 없는 현대차의 앞날을 걱정했다.

현대차는 정 회장 출두에 앞서 '정 회장의 경영 공백의 문제점'이라는 내부 자료를 만들었다. 자료의 요지는 '정 회장의 결단력이 오늘날 현대차의 글로벌 경영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현대차 기업문화의 특성상 카리스마 있는 오너가 사라질 경우 거대한 글로벌 경쟁의 바다에서 표류하거나 난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현대차 관계자는 "경제 정의를 실천한다는 검찰의 명분 때문에 해외 곳곳에서 일본 업체와 맞서는 글로벌 전쟁터에 타격을 줘서야 되겠느냐"고 주장했다. 현대차 그룹에는 10만 명이, 관련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30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현대차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미래 한국'을 먹여 살릴 텃밭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이다.

박재현.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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