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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정지’ 버튼 있는 최저임금 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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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

‘나우 하이어링(Now Hiring·직원 채용)’. 지난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이런 구인 광고를 창문에 붙여 놓은 상점을 여럿 봤다. 음식점·대형마트·기념품 가게 할 것 없이 곳곳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며칠 내내 그대로인 걸 보니 일할 사람 찾기가 꽤 어려운 듯했다. 실제로 3월 샌프란시스코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인 2.4%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내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꼽힌다. 노동자 권리 보호에서 선두에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속한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최고 수준의 최저임금을 자랑한다. 올해 시간당 11달러로, 50개 주 가운데 워싱턴주(11.5달러) 다음으로 높다. 연방 최저임금(7.25달러)보다 51% 많다. 해마다 1달러씩 올려 2022년 15달러를 달성하는 계획도 확정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인력 확보 경쟁이 붙으면서 기업이 자발적으로 임금 인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 코스트코는 곧 초보 사원 임금을 시간당 14달러로 올릴 계획이다. 치솟는 물가, 노숙자 증가 등 문제도 없지 않지만 일자리가 늘고 임금이 오르면서 경제에 활기가 도는 게 눈에 보였다.

호시절을 발판으로 5년 치 최저임금을 확정했지만 캘리포니아는 자만하지 않았다. 만약 경제 여건이 나빠지거나 주 정부 예산이 빠듯해지면 인상 계획을 일시적으로 멈추기로 합의했다. 일명 ‘일시 정지(pause)’ 버튼을 도입했다. 경제 악화 기준을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게 해놨다. 조건을 명문화했다. 이전 3개월 또는 6개월간 일자리 성장이 감소하고 12개월간 소매 판매가 줄 경우 주지사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해 또는 2년 안에 재정 적자가 예상돼도 마찬가지다. 매년 9월 1일 이전에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 유예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잘나가는 캘리포니아도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돌다리를 두드린다. 무턱대고 많이, 빨리 올리는 게 반드시 노동자에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정책 효과를 놓고 갑론을박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계소득 하위 20% 계층의 소득 8% 감소’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이 크게 늘었다. 긍정적 효과가 90%’ 등 상반된 주장이 나온다. ‘팩트는 고집스러운 것이지만 통계는 구부릴 수 있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정책은 단편적인 ‘통계’에 기반한 주장보다는 경제 전반에 대한 ‘팩트’를 기준으로 결정돼야 한다. 캘리포니아식 ‘일시 정지’ 버튼이 의미 있는 이유다. 일시 정지는 플레이를 누르자마자 다시 작동한다는 점에서 취소 버튼과는 다르다. 예측 가능성과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진다. 노동자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자리와 소비가 줄면 최저임금 인상도 헛되기 때문이다.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