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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불」로 꽃피운 고유 민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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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성화봉송 12일째… 취재기자 방담
그리스 헤라신전에서 채화된「하늘의 불」올림픽 성화가 지난달 27일 제주에 첫 기착, 봉송길 에 오른 지 오늘로 l2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21박22일의 성화봉송 기간 중 꼭 절반을 달린 셈입니다. 부산∼광주∼대구∼대전∼전주까지 북상 길의 현장취재를 통해 중간점검을 해볼까요.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성화봉송을 통해 각 시 군마다 고유민속과 문화행사를 펼쳐「지방민속박람회」를 방불케 했다는 점입니다. 성화가 북상하면서 주민들의 열기와 참여도 더 뜨거웠지요.
-성화가 지나는 곳마다 갖가지 민속문화행사가 벌어졌으며 눈길을 끄는 행사도 많았습니다. 전남지방의 경우 영암 구림고교생들의「왕인 박사 도일 과정」재현, 나주시의「삼현육각연주」등은 독창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부산에서도「성화맞이 문화축제」와「성화봉송연도 축제행사」로 동래지신밟기·동래학춤·수영야유 등 고유의 민속놀이가 펼쳐져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평소 이 같은 민속놀이를 대할 기회가 없었던 시민들은 한껏 흥겨워하면서도 진작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요.
특히 20∼30대 젊은 층들은 우리 민속의 진수를 자주 감상할 수 있도록 지방에 상실공연장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문화행사의 대부분이 성화가 통과하는 낮에 끝나버려「반짝하는 행사」라는 지적도 많았어요. 성화봉송이 각 지역의 문화를 활짝 꽃피우는데 공헌했지만 앞으로 이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계승시키느냐가 과제로 남았습니다.
-성화 도착을 전후해 5공 비리·언론인 테러사건·극우발언 등 정치·사회적 이슈 때문에 처음에는 성화봉송의 열기가 없었으나 성화가 북상하면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하루가 다르게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만 해도 동원 인파 외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으나 부산에서부터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 지난 1일 광주에서는 연도와 역 광장에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성황을 이뤘습니다.
-시 군 지역에서도 2만∼3만 명 이상씩 몰렸으며 아무리 외진 곳에서도 마을단위로 경운기나 자전거 등을 세워놓은 채 국도 변에 나와 손을 흔드는 등 올림픽이 전국민적 행사임을 실감케 했지요.
경북 예천의 봉송로 변에 구경나왔던 미 군병「폴·새버걸」씨(27)는「세계는 서울로」 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나왔는데『부대 안 상점에서 4달러를 주고 샀다』며『전우들도 성화봉송 일정을 다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올림픽조직위원회와 각 시 군 관계자들도『처음에 열기가 없어 걱정했는데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를 줄 몰랐다』며 즐거운 비명입니다.
-올림픽 붐을 조성하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의 구간에서 학생들을 부랴부랴 동원, 귀중한 수업시간을 빼앗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어요.
읍 면 단위의 작은 지역에선 20리 이상 떨어진 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이 1시간씩 걸어와 성화가 도착하기까지 뙤약볕에서 1∼2시간씩 기다리기 일쑤였어요.
-구미시의 경우 성화가 4일 오후 8시 도착했는데 여고생 1천여 명이 6시부터 나와 축 등을 들고 기다리다 정작 성화가 올 즈음엔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고 한복을 입은 채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안동시에서는 전통혼례식 재현 때 꼬마신랑 역을 맡은 한 유아원생(6)이 낮12시30분 성화봉송 때 하는 행사를 오전 9시부터 연습시키는 바람에 정작 행사 때는 조랑말 위에서 졸음을 참느라 울상을 지어야했지요.
-학생동원을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일생에 두 번 보기 힘든 성화봉송인데다 교육적인 기회도 되고요.
-물론입니다. 부산에서는 8월 29일 성화가 출발한 용두산 공원에서 경남도 경계인 김해 선암교까지 연장 29km의 성화봉송로 주변 2백70개 초·중·고교에서 8만여 명의 학생들이 동원됐는데 학생들이 성화가 학교 앞을 지날 때 환송하겠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엔 주민 참여도가 높아 굳이 학생동원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학생동원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기회를 주겠다는 발상에서가 아니라「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실적위주 식의 구태의연한 행정편의주의 적 발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냐 하는 점입니다.
수업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학생들에게 산 교육을 시킨다는 차원에서 자리 메우는 식의 동원이 아닌 수업의 연장으로「성화관람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올림픽조직위나 일선 행정당국의 행사진행상 문제점은 없었습니까.
-경찰의 과잉경비와 올림픽조직위의 고압적 자세는 올림픽의 이미지에 큰 홈이 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성화가 안치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비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승강이가 그치지 않았는데 지난 1일 광주에서는 경비구역을 넘었다는 이유로 경찰이 구경나온 시민을 집단폭행, 이를 부러뜨렸지요.
-한 시민은 이 같은 과잉 경비에 대해『공산분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감히 성화를 건드리겠느냐』며 분개하기도 했기요. 모처럼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올림픽도 좋지만 일선 행정기관에서 너무 성화봉송행사에만 매달러 행정 공백상대를 빚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화가 통과하는 전지역에서 행정공무원들이 행사준비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고, 특히 봉송 당일에는 관공서가 텅 비어 업무가 마비되는 바람에 민원 인들이 큰 불편을 겪는 것 같아요.
-전시행정도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경남 함양군의 경우 봉송로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는 점은 좋지만 88고속도로 양쪽이 산사태 등으로 황토 흙이 드러나자 이를 감추기 위해 뒤늦게 풀 씨와 함께 푸른색 발아촉진제를 뿌려 전시행정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냈지요. 봉송로 주변의 눈부신 치장과는 달리 뒷길에는 잡초를 그대로 방치해 주민들의 빈축을 샀어요.
-성화봉송이 아직도 절반 남았는데「이런 점은 이렇게」개선됐으면 하는 점은 없습니까.
-무엇보다 올림픽조직위원회와 행정기관의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는 고쳐져야 한다고 봅니다.
-제주에서는 성화 도착을 취재하기 위해 국내의 보도진 4백여 명이 몰렸는데 지나친 검문검색으로 불편을 겪었고, 특히 외신기자에 대한 홍보나 유인물 배포가 전혀 안돼 한국의 얼굴에 먹칠을 했어요.
-봉송구간의 질서의식이 아쉽습니다. 올림픽개최 국의 시민으로서 무엇보다 실종된 질서의식에 새삼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성화안치 식장의 주차장을 자신들만 사용하고 취재차량에는 아무런 배려조차 하지 않았는가 하면 호송단 중 호위차량의 횡포가 너무 심해「행사만 치르면 된다」는 식이 아닌가 해서 걱정됩니다.
-어느 봉송구간에서는 국회의원 이름을 써 붙인 차량이 행렬에 끼어 들어「이름 알리기 선거운동장」같아 볼 성 사나왔어요.
-지난 2일 낮 광주에서 대구에 이르는 봉숭구간 중 88올림픽고속도로는 차량봉송 구간이기 때문에 편도로 일시 통행제한만 하면 될 것을 왕복차선을 1시간 전부터 통행 금지시켜 트럭 등 생업관련 차량이 2km씩 늘어서 체증을 겪었지요.
-앞으로 남은 성화봉송구간의 준비상황은 어떻습니까.
-충북·강원·경기도는 이미 봉송을 끝낸 곳의 행사내용·규모 등을 면밀히 관찰한 뒤 더 잘해보겠다는 욕심이 생겨 각 시 군에 몇 차례씩 수정·보완지시를 내렸어요.
이에 따라 각 시 군에서는 기존의 계획을 뜯어고치느라 난리들인데 너무 경쟁이 심해져 후유증이 없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성화봉송의 열기가 뜨거워지는 만큼 서울·부산 등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도시 주민들에게 소외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되는 점도 없지 않아요.
올림픽 개회식 입장권이 3백만 원씩 웃돈이 붙을 정도로「부자들의 잔치」(?)로 인식되고 있는 데다 봉송로 주변 가꾸기에 지방민이 너무 동원돼『서울시민의 잔치를 위한 지방민의 출혈』이라는 비판도 일고있다고 합니다.
-또 행사가 절정에 이르는 성화안치소 주변에 사행성 행상들이 설쳐 무질서한 장터를 방불케 한 점은 바로 잡혀야겠어요.
-아무튼 성화봉송이 무사히 끝나고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져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직위원회와 행정기관·시민 모두가 자세를 가다듬고 모든 행사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겠습니다. <성화봉송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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