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로켓 전문가, 부엌에 착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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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육중한 고래 한 마리가 물기둥을 뿜어 올리며 대양을 향해 나아갔다.'

부엌가구 전문업체 에넥스 박진호(44.사진) 사장이 1999년 9월4일 밤에 꾼 꿈 이야기다.

당시 무궁화 3호 위성 발사의 실무 책임자였던 그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아리안 로켓 발사기지에 있었다. 발사체와 위성의 결합 이상으로 발사가 연기됐던 무궁화 3호는 다음날 대기권을 무사히 벗어났다.

2002년 그는 에넥스 상무로 자리를 옮겼다. 항공우주공학도(서울대 학사, KAIST 석.박사) 답게 "하늘을 보며 꾸어왔던 어릴 적 꿈을 좇는 일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외환위기 이후 건설경기 침체로 닥친 위기를 구조조정과 디자인 혁신으로 극복한 아버지 박유재(72) 회장은 중국 시장 공략과 친환경 소재 개발을 추진하던 시점에서 그를 불러 들였다.

그에게는 새집 증후군의 우려가 없는 친환경 소재를 찾아내는 일이 맡겨졌다. 가구의 외장을 PVC 등 화학소재를 접착해 꾸미는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88년부터 축적해 온 가구 도장 기술을 살리돼 휘발성 유기용제를 섞는 도료 대신 수용성 도료를 채택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도료를 입힌 뒤 판재를 자르면 도료가 벗겨지면서 절단면에 홈이 패이는 현상이 반복됐다. 50억원 짜리 설비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2년이 흘렀다.

박 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도료 제조사와 함께 끊임없이 도료를 개선하고, 세계 각국의 판재를 뒤져 스페인에서 가공성과 내구성을 갖춘 판재를 찾아냈다.

환경호르몬 방출을 차단하고 항균 기능까지 갖춘 '냄새 나지 않는 가구 소재' 워터본(Water Borne)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 사장은 "위성을 개발하면서 수없이 닥쳐왔던 기술적 한계를 동료들과 함께 극복했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다음달 부터 에넥스 전 제품에 '워터본'을 적용키로 한 박 사장은 올해를 "재도약을 위한 준비기"라고 말한다.

흑자기조 전환이 급선무다. 2004~2005년 건설경기가 나빠졌는데 불구하고 투자를 늘린 탓에 회사는 지난해 29억원의 적자를 냈다. 이에 따라 매출의 60%를 신축 아파트에 의존하는 매출구조를 바꿔 주부를 상대로한 판촉에 팔을 걷기로 했다. 또 관련 업체들과 힘을 합쳐 수입에 의존하는 워터본의 도료와 판재를 이른 시일안에 국산화할 계획이다.

주말이면 앞치마를 둘러 요리를 만든다는 박 사장은 "부엌은 주부들의 노동이 소외되는 공간이 아닌 생활 문화의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가전 제품들이 가사 노동을 바꿔왔듯 부엌의 변신이 보다 인간 중심적인 생활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71년 오리표 싱크대로 출발해 92년 이름을 바꾼 에넥스는 '로켓 발사 전문가 박진호'를 선장으로 앉히고 비상을 꿈꾸고 있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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