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수" 대입 눈치작전 극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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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문교부는 현행 대학입시제도와 졸업정원제를 대폭 개선하여 88학년도부터 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문교부의 이 같은 조치는 전두환 대통령께서 지난 5년 동안 실시해온 대입제도와 졸업정원제가 그 취지와 현실간의 괴리로 걱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는 점을 감안, 교개심이 건의한 개혁안을 토대로 개선안을 마련하여 시행토록 일대용단을 내리신 데 따라 취해진 것입니다.』
86년 11월 25일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은 갑작스럽고도 획기적인 발표를 했다. 과외금지와 함께 국보위가 만든 교육개혁안의 근간인 대입제도와 졸업정원제가 바로 그 당사자인 전대통령의「용단」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입 본고사 폐지 및 대학 졸업정원제실시는 사실 과외금지 조치와 세트로 묶여진 것으로 일종의 보완조치 적인 성격이었다. 따라서 과외금지 방침이 정해지면서 대입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는 큰 논란 없이 결정됐다.
『중학무시험 제도와 고교평준화 제도로 입시지옥은 상당히 해소됐으나 대학입시에서「병목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병목」을 통과하기 외해 경쟁이 치열해지고 과열 과외의 병폐가 생겼다고 판단한 겁니다.』문교부 측에서 국보위에 참여한 정태수씨의 설명.
이 대목에서 대입제도 개선과 졸업정원제에 관한 당시 군인들의 시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과외수업을 받아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중요한 깃이 아니라 일단 대학의 문호를 넓힌 뒤 그 다음 공정한 경쟁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대입성적과 대학 졸업성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자료가 그런 판단을 하게 했던 거죠. 다시 말해 대학진학 수단으로 여겨진 과외를 없애는 대신 대입정원을 늘러 이를 보상해준다는 발상이었던 것 같습니다.』연구팀으로 참여했던 L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교육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설명이고 그 이면엔「대학의 상황」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당시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대학생이 데모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었지요. 우리 대학생들이 선진국 학생들에 비해 3분의1밖에 공부를 안하고 있는데, 이래가지고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종종 했어요,』국보위원 C씨는 당시 졸업정원제 채택이 대학생에게 공부도 시키고 데모도 막는 양수겹장의 효과를 노렸다고 말했다.
대입제도와 졸업정원제를 논의하면서 거론된 대학 평준화 구상은 주도세력들의 또 다른 발상을 보여준다.『대입정원이 절대적으로 적고 대학간의 등급이 매겨져 있는 상황에서 입시경쟁을 해소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대학평준화」였던 것 같습니다. 고교의 평준화 입시처럼 전체 정원만큼 지원자를 선발해 희망대학에 균일하게 배정하자는 아이디어였죠.』
C씨는 그러나 이 대학평준화 구상은 고등교육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반대에 부닥쳐 아이디어로 끝나고 대신 경쟁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당시 공청회에서 서울대 권이혁 총장은 다음과 감은 반론을 폈다.『정원을 늘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학의 질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원을 늘리되 대학의 질이 저하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의 평준화 논의는 좀 성급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정신을 가진 우수한 두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른바 엘리트 역할의 중요성이죠. 대학을 평준화함으로써 엘리트 양성마저 포기하는 방안은 한마디로 난센스입니다.』
당시까지「예비고사+본고사」로 치러지던 대입제도가 본고사는 폐지되고「예비고사(후에 학력고사)+고교 내신성적」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대두된 문제는 대학의 자율성, 예비고사 및 내신성적의 타당성 등이었다.
당시 논의의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인터뷰(신동아 80년 9월호)는 다음과 같다.『제가 연세대에 있을 때 몇 년 동안 학생들의 본고사 성적과 예비고사 성적의 순위를 비교해보았더니 거의 일치했습니다. 선발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기준이 한번 주어지면 거기에 의존해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라는 청소년에게 반복해 몇 번이나 시험을 치게 함으로써 괴로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또 학교의 개성을 위해 시험을 치겠다고 하는데 이는 시험으로 테스트할 성질이 아니지요. 고교내신을 겨냥한 치맛바람을 걱정하는데 이것을 철저히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나라 교육은 언제까지나 정상화될 수 없다고 봅니다. 결국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해 대학에 받아들일 때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여러 이론은 해소될 것입니다.』
7·30 개혁에 의해 본고사가 폐지되고 입학정원이 10만1천45명(교대·전문대포함)이 늘어난 81학년도 입시에선 엄청난 혼란과 이변이 일어났다.
서울대·연대·고대 등 소위 명문대를 비롯한 전국 28개 대학에서3천4백여 명의 미달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예견된 시행착오였습니다. 무제한의 복수지원 허용에 따른 허수경쟁, 대학별 예상합격선 발표에 따른 눈치작전 등 입시가 아닌 도박을 방불케 했죠.』
당시 문교부에서 대입업무를 맡았던 K씨의 회고.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김종빈 대학교육국장이 경질되기도 했다.
예비고사 성적 1백84점으로 서울대법대에 합격,「배짱지원」의 신기록을 남겼던 윤 모군은 결국 몇 년 뒤 자진해 학업을 포기, 실패한 입시제도를 대변했다.
「눈치입시」로 일컬어진 대입제도는 복수지원 제한 및 폐지, 논술고사 실시, 학력고사 성적분포 공개 등 잇단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결국 88학년도 입시부터 학교별 선 지원-후 시험과 주관식 문제 출제로 바뀌었다. 즉 국가관리 입시가 학교관리로 가는 중간단계에 와 있으며 앞으로 입시자율화로 환원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졸업정원제는 7·30 당시의 구상과 방식이 시행과정에서 변질돼 실패했다는 견해가 많다.
『졸업정원제는 대입 병목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입학정원을 풀되 타율에 의해 학생들의 질 관리를 한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시행 첫해의 초과모집 비율 30%를 점차 늘려 무정원제로 간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정태수 위원은 이 구상이 대학의 현실여건을 고려하지 않은「이상론」이었다고 시인했다.
김상준씨도『대학에서 공부하는 분위기가 정착되면 정원은 학교에 맡겨도 된다는 생각이었죠. 이는 졸업정원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한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사실 졸업정원제는 7·30이전부터 전문가들에 의해 거론되어 왔으나 일률적인 초과모집·강제탈락의 방식은 아니었다.
연구팀에 참여한 L씨는『강제탈락을 전제로 한 교육은 곤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탈락을 유도하며 4년 동안 경쟁을 하도록 하되 모든 학생이 일정수준 이상이라면 굳이 탈락시킬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이었죠』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국보위에 의해「졸업정원제 지향」이라고 표현됐던 이 정책은 81년 1월 시행지침이 마련됐다. 2학년말까지 졸업정원의 18%를 탈락시키고 4학년 등록 학생은 졸업정원의 10%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해 L씨는『깜짝 놀랐다』고 회고하고, 이 강제 탈락제도가 그후 심한 후유증과 함께 실패의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82년과 83년에 걸쳐 전국 대학에서 8백여 명의 강제탈락자가 생기며 대학가의 쟁점으로 등장하자 문교부는 부분적인 보완작업에 들어갔다.
84년부터 시행된 1차 보완은▲학년별 탈락비율 자율화▲졸업정원제 운영단위 자율화▲여대 및 의학계의 신입생 모집비율 자율화▲수료자에 대한 졸업자격고사 실시 등이 골자였다. 또 85부터는 신입생 초과모집비율이 자율화됨으로써 졸업정원제는 사실상 명목만 남게 되었다.
졸업정원제 폐지 후 남은 문제는 강제탈락자 처리와 87학년도까지 졸업정원제를 적용 받아 입학한 재학생들에 대한 경과조치. 강제탈락자 구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현재 재학생 중 졸업정원 초과수료자는 학교별로 실시되는 자격고사를 거쳐 졸업장을 받게된다. 84년 이후 졸업자격고사를 통해 1만8백36명(합격률 평균 97%)이 졸업을 인정받았다.
과외금지·대입제도개선·졸업정원제 이외에 교육대의 4년제 승격·사학정비·교육세징수 등 전반적인 교육개혁 내용은 변혁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육계의 일부 세력이 집권세력과 타협하고 그들의 힘을 빌었던 7·30 교육개혁은 법이나 제도로 밀어붙이면 따라올 것으로 생각한「위로부터의 개혁」이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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