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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국민과 어울림의 항해 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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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명숙 신임 총리가 19일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동료 의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오종택 기자

"대한민국호에 야당과 여당, 국민과 함께 타고 가면서 어울림의 항해를 하겠다." 정부 수립 후 58년 만에 첫 여성총리가 된 한명숙 총리의 일성은'함께하기'였다. 한 총리는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 표결을 통과한 뒤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 참석했다. 그는 한나라당과의 관계를 의식한 듯 "선거기간 중엔 당정 협의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정동영 대표는 "딸들에게 희망, 여성들에게 빛을 줬는데 이제 남성들에게 희망과 안정감을 달라"고 했다.

한 총리가 인준의 벽을 무난하게 넘은 것은 한나라당이 자유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가 자녀 병역, 국적, 부동산 등에 문제가 없었기에 업무능력 미흡만을 이유로 반대당론을 정할 명분이 없었다.

청문회에서 보여준 부드러운 성격과 진솔한 답변도 의원들의 마음을 끌었다. 한 총리는 결혼 6개월 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13년간이나 수감됐던 아픔을 겪었다. 본인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여간 영어의 몸이 됐다. 하지만 늘 환하게 미소짓는 그의 표정에선 어두운 그늘을 찾아보긴 어렵다. 청문회에서 "한이 맺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굴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 저는 한이 맺히지 않았다"고 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을 이미 용서했다.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 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한 데 대해서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좌파 정책이든 신자유주의 정책이든) 다 쓸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설득력 있게 얘기했다.

한 총리의 등장은 본격적인 여성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는 "당 대표.총리 등 대통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자리에 여성이 진출하고 있는 셈이어서 자라나는 젊은 세대나 여성들의 정치 참여에 획기적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참여정부 3기를 이끌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1년8개월을 남겨둔 시점이다. 그의 앞에는 고건(1기).이해찬(2기) 전 총리와 다른 새로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 마지막 총리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그동안 현 정부가 펼쳐온 정책들을 갈무리해야 하는 위치다. 민심을 회복해 나락에 떨어진 참여정부의 신뢰를 끌어올려야 하는 짐도 졌다.

야당과의 관계설정도 숙제다. 이해찬 전 총리가 국회에서 '차떼기 정당'으로 비난하면서 멀어질 대로 멀어진 한나라당과 새롭게 만나야 한다. 한 총리는 청문회에서 "(과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했던 것은) 적절치 않은 표현으로 유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노 대통령과의 업무분담은 향후 국정운영 기조와 직결되는 문제다. 청와대는 일단 분권형 국정운영 기조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권 내부에선 5선의 관록으로 정책통이던 이 전 총리 때와는 달리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경제부처나 힘겨루기를 하는 부처들 사이의 업무조정에서 전임 총리들과 같은 장악력을 보이긴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관가 안팎에서 나온다.

이 전 총리가 각종 개혁정책을 힘있게 밀어붙이는 '실세형 책임총리'였던 반면 한 총리체제는 기존의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관리형 책임총리'가 될 것이란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되면 한.미 FTA 협상, 양극화 해소 등 중장기적인 국정과제에 전력을 쏟겠다는 노 대통령이 일상적인 내치(內治)업무에 간여하는 빈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총리 분권 실험이 변형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총리가 여성 프리미엄에 의지해선 안 된다는 주문이 많다. 강원택 교수는 "성공한 총리가 되려면 국정운영 과정에서 업무능력과 조직 장악력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이기 때문에 총리가 됐다'는 얘기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의전 총리.대독 총리로 전락한다면 정국 돌파를 위한 일회용 카드로 여성총리로 기용됐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한 총리에겐 기회와 시험이 동시에 기다리고 있다.

이정민.이가영 기자 <jmlee@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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