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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경쟁 장기전 포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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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인 중간평가가 필요 없다는 쪽으로의 방향선회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가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김 총재는 자신의 이 같은 의중이 보도되자 일단 아직은 고려할 단계가 아니라고 유보적 태도를 보였지만 당내에서는 시기상조일 뿐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김 총재의 이 같은 의중은 어느 날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온 즉흥적 산물은 결코 아니고 총선 이후 상당기간 김 총재 나름의 치밀한 계산과 향후 정국운영 및 주도방향에 대한 깊은 현실탐색 끝에 굳힌 회심의 정치적 빅카드로 봐야한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일상적인 유화제스처 차원으로만 보기에도 마땅찮은 김 총재의 이 같은 정치선언고려 배경에는 정부·여당이 이를 받아들이면 좋고, 안 받아들여도 나쁠 것이 전혀 없는 절묘한 계산법과 철저한 승부근성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따라서 평민당 내는 물론 외부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디딤돌로 노 정권에 대한 한판승부를 걸 것으로 관측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이와 정반대의 카드를 고려하게된 김 총재의 속셈이 뭔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김 총재의 중간평가 불필요선언은 정부·여당의 여하한 대응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선거이후 지금까지 「컴퓨터 대통령」운운하면서 어정쩡하게 「묵인」해온 노 정권에 대해 실로 8개월 여 만에 꽃다발을 보내 공식 인정하는 선언인 동시에 올림픽이후 중간평가를 골인 목표로 한 「단거리 경주」의 포기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행 4당 체제를 끌고나가면서 93년의 대권고지를 향한 장기전체제로 돌입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차기집권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김 총재는 무엇보다 차기집권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상표처럼 따라붙고 있는 그의 강성이미지를 엷게 할 필요성을 절감했음직하다.
총선거 후 김 총재는 이 같은 부담을 덜기 위해 다방면에 걸친 연성이미지부각 노력을 해왔으나 단기간내 세간의 「불신」을 씻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김 총재로서는 노 정권을 공식인정하고 중간평가를 통한 「단기승부」를 포기함으로써 비롯되는 극력 지지 세력의 불만 등 손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 총재가 중간평가불필요론을 먼저 제기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짐」을 덜어주고 노 정권의 안정과도 함수관계에 있는 여소야대의 4당 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으며 단기승부가 아닌 장기승부를 명확히 천명함으로써 평민당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춰나가는 등 면모일신을 꾀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득은 일부 지지세력의 이탈이라는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을 했음직도 하다.
이 같은 단기전의 포기에는 사실 김 총재가 가장 취약점으로 여기고있는 안정희구의 중산층을 겨냥한 측면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김 총재의 선언 고려배경에는 이와 같은 표면적인 이해득실 차원과는 또 다른 핵심문제 하나가 깊이 관련돼 있지 않나 싶다. 중간평가라는 시점을 향해 강경대립으로 치닫고있는 현 정국에 대한 제도권 안의 제1야당으로서의 대안제시 또는 대응방안의 하나가 아니냐는 시각이 그것이다.
즉 두 차례에 걸친 남북학생회담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이른바 좌우대결양상은 시간이 갈수록 쌍방간의 강경입장을 증폭시켜 경우에 따라선 정치권이 손쓸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해 「계엄상황」의 우려마저 낳게 하고있는 그 같은 위기상황이 교묘하게 중간평가와 연계돼 중간평가자체가 마치 위기상황의 「뇌관」구실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야당 총재의 중간평가 불필요론은 사회긴장을 촉발하는 「뇌관」을 제거, 당면한 올림픽을 원만히 치르고 올림픽이후의 정국을 특위활동·지자제실시 관철 등 정상적이고도 장기적인 합의 투쟁의 방향으로 돌리는데 도움을 주리라는 것은 있을 법한 판단이다.
따라서 광주사태·5공화국 비리문제는 물론 「지자제투쟁」과 관련, 다소 강경한 태도로 나서도 정가 일각에서 적어도 『재 신임기회를 노린다』는 오해만은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이 또한 김 총재로선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여러 고려할만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김 총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 하나가 그의 정치선언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투표 형태의 중간평가로서는 야당이 승산이 없다는 점이다.
김 총재의 한 고위측근은 『우리 헌정사에서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정부가 없다』며 『이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의 하나』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최근 재야인사들을 동교동에 초청한 자리에서 여권 내 강경파의 「준동」을 차단시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도 평민당과 재야가 노 대통령의 입지를 도와줘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김 총재는 그 「협력」의 정체에 대해 『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수 차례에 걸쳐 분명하게 부인하고 나섰던 반면 「중간평가 불필요론」보도에 대해서는 『오보라 할 수 없다』는 말로 간접 시인했다.
설사 여권이 김 총재의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평가를 강행한다 손치더라도 김 총재로선 『해 볼 테면 해보자』는 말로 야권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기초는 마련된 셈이다.
김 총재가 의중에 품고있던 회심의 카드가 발표이전에 언론에 보도됨으로써「숨겨둔」카드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그렇다고 이 선언이 담고있는 다각적 포석의 생명력까지 약화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는 까닭에 오히려 자신의 복안에 대한 여론검증의 기회까지 거치면서 보다 완벽한 논리 포장돼 김 총재의 입을 통해 멀지않아 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고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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