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학로 흥행보증수표… "반바지 입고 정장 연기? TV는 어려워"

중앙일보

입력

배우 이석준. 연극 '킬롤로지'의 알란 분장을 한 채 인터뷰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이석준. 연극 '킬롤로지'의 알란 분장을 한 채 인터뷰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킬롤로지''카포네 트릴로지' 등 #1년 새 연극 8편 출연 배우 이석준 #"질문 던지는 작품에 마음 움직여"

배우 이석준(46)은 연극계에서 흥행보증수표로 통하는 이름이다.  원래 뮤지컬 배우로 출발했고 한 때  ‘추상미 남편’으로 더 유명하기도 했지만 이젠 대학로에서 ‘캐스팅 0순위’ 연극 배우로 꼽힌다.  최근 1년 동안 출연한 연극만도 ‘더 헬멧’ ‘킬 미 나우’ ‘엘리펀트송’ ‘14人(in) 체홉’  ‘프로즌’ 등 여덟 편에 이른다. 지금도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와 ‘킬롤로지’ 두 작품을 동시에 소화해내고 있다. 그를 지난 23일 ‘킬롤로지’ 공연장인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만났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알란 역으로 분장한 채 인터뷰에 응한 그는 “대본을 분석해 텍스트를 ‘배우화(化)’시키는 작업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다”며 연극 무대를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이다’(2005),  ‘카르멘’(2002) 등 뮤지컬로 이름을 알렸는데, 최근 활동은 연극에 집중된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좀더 몰두해보자는 생각으로 하다보니 연극을 많이 하게 됐다. 배우 생활 초창기엔 뮤지컬을 주로 했다. 재미있고 신났지만 뭔가 해소가 안되는 게 있었다. 2006년 한태숙 연출가의 ‘이아고와 오셀로’에 출연하면서 연극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뮤지컬에서 배우는 이미 짜여진 것을 잘 수행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연극은 분석하고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로서의 배우를 원한다. 내게 뮤지컬은 ‘일거리(job)’에 가깝고, 연극은 ‘인생(life)’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제 뮤지컬에선 은퇴했다’고 한다. 그래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기회가 되면 출연하고 싶은 작품이다.”
 TV나 영화 출연은 꺼리는 건가.
“연극 출연 제안은 공연 1년여 전부터 들어오지만 드라마는 촬영 2∼3개월 전에 캐스팅을 확정한다. 드라마에 출연하려면 이미 결정돼 있던 연극 공연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게 아깝더라. 또 몇 차례 드라마에 출연해 봤는데도 TV 배우로서의 기술을 익히기가 어려웠다. 그날그날 관객의 분위기에 맞춰 함께 호흡하며 연기를 하던 배우가 스태프 수십 명에 둘러싸여 카메라에 대고 연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전날 나온 대본으로 연기해야 하는 것도 적응이 안 됐다. 상체만 나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 윗옷만 정장을 입고 반바지·슬리퍼 차림으로 연기하는 배우도 봤다. ‘연기천재 아니냐’란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웠다. 이렇게 연극배우와 TV드라마 배우에게 필요한 기술은 완전히 다르다. 수영선수와 야구선수의 차이 정도다. 야구선수가 일반인보다 수영을 빨리 배울 수는 있겠지만 수영선수가 되기는 어렵지 않겠나. " 
출연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인가를 본다. ‘우린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됐어’ 하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보면서 스트레스 해소하는 류의 작품에도 별로 만족하지 못한다. 발품 팔아 온 관객들이 함께 머리 굴려 답을 찾아내도록 물음표가 많은 작품을 만나면 ‘배우로서 한번 해볼 만하겠다’란 생각이 든다. ”

그가 출연 중인  ‘킬롤로지’는 영국 작가 게리 오언의 신작으로, 지난해 3월 카디프에서 초연했다. 지난달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시상식에서 협력극장 작품상(Outstanding Achievement in an Affiliate Theatre)을 받았다. 극 중 ‘킬롤로지’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온라임 게임 이름이다.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된 아이 데이비와 그의 아버지 알란, 게임 개발자 폴의 독백을 통해 현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파헤친다.

연극 '킬롤로지'에서 연기하는 이석준 배우. [사진 연극열전]

연극 '킬롤로지'에서 연기하는 이석준 배우. [사진 연극열전]

연극 ‘킬롤로지’는 아버지의 부재, 부자(父子) 사이의 소통 단절을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폭력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출발점을 가정에서 찾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부재, 또 공동체의 부재로 시선을 확대해 가면서 가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거대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류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 메시지는 변할 것 같지 않다.”

그는 한국 모노드라마의 전설 고 추송웅(1941∼85) 배우의 딸 추상미(45) 배우와 2007년 결혼해 초등 1학년인 아들을 두고 있다. “최근 2년 동안은 일이 너무 많이 2,3일 연달아 쉬기도 어려웠다”는 그는 “아들과 저녁 때 못 놀아주는 대신 아침에 놀아주고 있다. 오전 7시에 일어나느라 잠을 확 줄였다”고 말했다.  ‘킬롤로지’에 출연하면서 그는 아버지란 자리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어린 데이비를 버리고 떠났던 아버지 알란보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던 폴의 아버지에 감정 이입이 된다. 아들을 위한다면서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공연계에서 ‘지탱’ 콤비로 불리는 지이선 작가, 김태형 연출과 함께 하는 작업이 많다. 이들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과 2016년 재연에 이어 이번 삼연까지 출연하고 있는데, 특별히 잘 통하는 이유가 있나.
“두 사람이 시도하는 연극의 ‘공간 파괴’에 나 역시 관심이 많다. 프로시니엄 무대가 배우과 관객 사이를 가로막는 것 같아서다. 작은 호텔방처럼 꾸며놓은 공간에 배우와 관객이 함께 들어가 공연하는 ‘카포네 트릴로지’, 무대를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양쪽에서 동시에 다른 공연을 하는 ‘더 헬멧’ 등 형식과 공간을 파괴하는 이들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신선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미투’ 운동 여파로 한동안 연극계가 혼란스러웠다.
“잘못인지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았던 시대를 지나왔다. 공연계 미투 운동이 불거진 직후엔 연습장에 남녀 배우가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하기도 했다. 이젠 서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이번 ‘킬롤로지’ 공연에 앞서 성폭력 예방교육도 받았는데, 직업군의 특성에 따라 좀더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낯선 배우와 키스를 하고 스킨십을 하기도 한다.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많다. 이런 직업군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기준을 만들어 교육했으면 좋겠다.”

그는 “오는 7월 22일 ‘킬롤로지’ 막을 내린 뒤엔 한 두 달이라도 쉴 생각”이라고 했다.  “잘못하면 기존 내 연기 스타일을 반복하는 ‘돌려막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새로운 생각과 기술이 만들어질 기회가 생기도록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키고 싶다”면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 다시 도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