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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이 해석한 '버닝' 비하인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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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누군가는 저지르고 모험해야죠.”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이창동(64) 감독은 소탈했다. 17일 개봉한 8년만의 신작 ‘버닝’의 개봉 2주차 관객은 40만명 남짓. 손익분기점 250만명엔 턱없이 못 미친다. 저조한 흥행성적에 대해 그는 “예상은 했지만 나름대론 대중과 소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서 “흥행 성공모델만 따라가면 발전할 수가 없다”고 했다.

8년만의 연출 복귀작 '버닝' 인터뷰 #허구와 즉흥성 사이 어려운 작업 #"마블영화에 처절히 깨진 것도 운명"

오히려 국내외 반응 차이를 흥미롭게 봤다. 19일 폐막한 제7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버닝’은 본상 외 번외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벌칸상) 2관왕에 그쳤지만, 대상인 황금종려상 유력 후보로 점쳐질 만큼 평가가 높았다.

“칸에선 호불호가 갈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좋아했어요. 국내외 온도 차가 예상보다도 커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죠.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면 저나, 한국영화 전체로나 자극이 됐을 텐데 아쉽습니다.”

'버닝'으로 제71회 칸영화제에 참석한 이창동 감독. [사진 CGV 아트하우스]

'버닝'으로 제71회 칸영화제에 참석한 이창동 감독. [사진 CGV 아트하우스]

‘버닝’은 미스터리로 시작해 더 큰 미스터리로 끝나는 영화다. 토대가 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확장했다. 혼자 살던 20대 여성 해미(전종서 분)가 실종되자 어릴 적 친구인 작가지망생 종수(유아인 분)가 정체불명 남성 벤(스티븐 연 분)을 추적하는 등 스릴러 구조를 띠지만 손에 잡히는 실체는 하나도 없다. 해미는 사라진 걸까, 살해된 걸까, 스스로 자취를 감춘 걸까.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속 시원히 물어봤다.

※주의!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가 어렵다는 분위기다.
“제 영화에 대한 약간의 오해가 있다. 저를 되게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이라 생각하시는데 저는 그냥 질문할 뿐이다. 답을 찾는 건 관객의 몫이다. 흥행 영화는 잊히기도 하지만 불편한 질문은 시간이 지나도 남는다.”

-젊은 세대의 분노에서 출발했다고.  
“옛날과 달리 지금은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고 싸워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이 있다. 세상은 더 좋아지지만 정작 자신에겐 미래가 없는, 그런 처지의 젊은이들에겐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로 보이지 않을까 했다. 나름대론 꽤 여러 겹의 코드를 심어놨는데 안 읽히고 있는 게 굉장히 많더라.”

-힌트를 준다면.
“남산타워는 서울이란 대도시의 상징이다. 그 바로 밑 해미의 좁은 집엔 하루 한 번 창문너머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햇빛이 들이친다. 햇빛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믿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영화의 구조적인 수수께끼가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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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첫 장면 촬영 중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배우 전종서(왼쪽)와 이창동 감독. [사진 CGV 아트하우스]

영화 '버닝' 첫 장면 촬영 중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배우 전종서(왼쪽)와 이창동 감독. [사진 CGV 아트하우스]

‘박하사탕’(1999)의 5.18 민주화운동, ‘시’(2010)의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등 이창동 감독은 연출작마다 사회적 비극이 낳은 파장을 이야기해왔다. ‘버닝’은 오늘날 부와 계급이 만든 갈등으로도 읽힌다. 범죄자로 전락한 아버지 대신 경기도 파주 시골집에 머무는 가난한 종수와 서울 서래마을의 고급 아파트에 살며 포르쉐를 모는 벤은 몸에 밴 여유부터 다르다. 해미를 두고 종수는 벤을 연적으로 여긴다. 이창동 감독은 벤의 포르쉐에 대해 “종수에겐 뭔지 알 수 없고 바라지만 자기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며 “어쩌면 분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의 상징으로 그렸다”고 했다.

-영화를 만들며 구체적으로 염두에 둔 젊은 세대의 모습이라면.  
“보통 한국 젊은이들은 종수와 벤 사이 어디쯤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제가 취재한 바론 종수의 삶이 더 보편적이었다. 벗어나고픈 아버지 세대의 현실에 묶여, 무력하게 살아가는 젊은이가 의외로 많다.”

-종수의 고향을 파주 농촌으로 정한 이유는.  
“농촌은 사라져가는 공간이다. 종수는 없어져가는 그곳에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며, 과거와 연결된다. 파주는 서울에서 불과 40분 떨어져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남방송이 들렸다. 도시에선 안 들린다고 착각할 뿐이지 무의식중엔 계속 들려오는 남북 대립의 상징이다. 종수에겐 ‘자기 현실’이 아닌 상태로 살아야 하는 ‘현실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무언가인 셈이다.”

-힘든 처지에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해미는 청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벤은 해미가 실종된 뒤 또 다시 해미와 비슷한 여성을 골라 데리고 다니며 종수의 의심을 받는다.
“좋게 해석하면 벤이 그런 여성에게 끌릴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사람인진 알 수 없다. 직접적으로 해미를 해코지 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사람이 ‘숫자’가 되면 살인이 아니게 된다. 구조조정이나 펀드매니저를 통해 투자를 한다 해도 그게 많은 인과관계를 거쳐서 누군가 죽을 수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열 명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이 세계의 또 다른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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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비하인드컷. [사진 CGV 아트하우스]

영화 '버닝' 비하인드컷. [사진 CGV 아트하우스]

-우연히 포착된 듯한 풍광도 있더라.  
“영화란 만들어진 허구와 즉흥성 사이의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감독이 신처럼 모든 것을 창조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영화매체의 속성에도 배치된다. ‘버닝’에선 음악·촬영·사운드 등 각각의 요소가 계산이 아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 긴장감과 다른 느낌들을 자아내길 바랐다.”

-배우도 자유롭게 연기하도록 열어뒀다고.  
“가능하면 배우에게 뭔가 분명하게 요구하지 않는 편이다. 이번 영화는 캐릭터의 내적 동기를 정해놓는 순간 제가 보여주려는 미스터리가 깨질 것 같아 좀 더 열어둬야 했다. 특히 벤은 정체를 규정짓기 어려운 인물이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벤 역에 스티븐 연을 캐스팅했는데.
“다른 배우가 하기로 했다가 촬영이 연기되면서 새로 캐스팅을 해야 했다. ‘옥자’(2017)를 통해 알고는 있었는데, 공동 각본한 오정미 작가가 추천했다. 첫 만남에서 벤에 대해 존재론적 위기란 말을 하더라. 일종의 공허함인데, 벤이란 인물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말로 설명하기 전에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말이 익숙지 않은 데 대해선 연기자로서 능력을 믿었다.”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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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은 모처럼 절제된 캐릭터를 만났다.  
“뭘 막 표현하고 강렬한 역할을 많이 했잖나. 종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인물이고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걸 태우고 벌거벗은 종수에겐 결국 무엇이 남나.  
“벌거벗은 이미지 그 자체 아닐까. 그 순간의 감정도 두려움일지 통쾌함일지 모를 원초적인, 막 태어난 생명체 같은 느낌.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상징이나 관념보단 각자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감독으로선 ‘버닝’이 어떤 영화로 남을까.  
“이 영화가 처한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종수나 해미 같은 처지에 놓은 청년의 이야기인데 벤의 세계에 가까운 칸영화제의 붉은 카펫에서 공개됐다. 세상의 미스터리에 우리가 어떤 분노를 갖는지 말하는 영화인데, 극장에선 하필 수퍼히어로가 세상을 구원해준다는 마블영화와 맞붙어 처절히 깨졌다. 그 또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버닝’이 지금 대중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서사라면 환영받는 서사는 뭘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영화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다음 작품은.
“8년간 여러 프로젝트를 고민하다 보류한 차여서 사실 하고 싶은 게 많다. 짧은 기간에 선보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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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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