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이들과 투닥거릴 때 무조건 내 편 되기로 했던 남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4)

지난 글에 이어 또 여행 이야기다. 이번엔 남편이 최고였던 순간을 이야기해본다.

손자도 생겨 식구가 불어난 어느 해에도 아들 부부와 중간에서 만나 즐거운 여행길에 올랐다. 며느리는 해외에서 공부한 유학파라 영어를 큰 불편 없이 사용했지만, 아들은 아직 못 미더웠다. 우리는 혹시나 길을 잃을까 봐 며느리만 졸졸 따라다녔다.

여행 둘째 날 며느리와 손자는 쉬게 하고 아들이 우리 부부를 데리고 투어를 가기로 했다. 며느리는 “어머님, 저는 교과서 영어지만 남편은 현지 생활 영어라 믿으셔도 돼요. 저보다 현지인들과 훨씬 소통이 잘 돼요” 하면서 아들을 치켜세웠다.

외국인 가이드와 아들은 대화의 억양이 너무 세 둘 다 짐작으로 알아듣는구나 하고 살아온 연륜으로 감을 잡았다. 그래도 흥미롭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 아들에게 “뭐라 카는데?”하고 물으니 “코끼리 보러 가는 길이래요”라고 답했다.

“대화가 길던데 그리 간단하나? 다시 해석해봐라. 머라 카던데잉?” 하며 조르니 “엄마, 코끼리 보러 가는데 뭘 그리 궁금할까. 그냥 우리끼리 날씨 이야기 한 거야”고 말한다.

당일 투어 함께 나선 아들과 말다툼 

우리를 위해 코끼리 구경을 시켜준 고마운 아들이지만 짜증내는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중앙포토]

우리를 위해 코끼리 구경을 시켜준 고마운 아들이지만 짜증내는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중앙포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더운 날 코끼리 구경을 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인데, 이것저것 물어보니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뭐 감정도 없는 동물인가? 나도 순간 짜증이 났다. “야, 성의 없이 가이드 할 거면 안 볼란다” 하고 튕기니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당일 투어는 여섯 군데 정도를 들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마다 가이드가 바뀌고 차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니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는 우리 부부는 유치원생처럼 아들 뒤통수만 보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와중에 내가 들고 간 작은 가방을 차에 두고 내린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 가슴이 벌렁거렸다. 가이드와 통화한 아들은 다음 코스에서 받을 수 있게 됐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가방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돼 여러 번 확인 차 물었으나 몇 번은 잘 대답해 주다 짜증을 내는 것이다. “엄마 아까 내가 다음 코스에서 찾아 준다고 했지요? 어린애도 아니고, 에고.”

직전 해에 며느리랑 여행할 때는 몇 번이고 물어도 대답을 잘해주더니만, 내 자식이라는 놈이 어쩌면 이럴 수 있나 내내 서러운 마음으로 투어를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호텔에 돌아왔다. 며느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잘 다녀오셨냐고 반겨줬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는 말에 낮의 감정이 치받쳐 “안 먹어” 하고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평소 내 적군인 남편이 “나도 안 먹어” 하며 나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평상시 늘 아들과 투닥거리면 어른이 참아야지 이기려고 하느냐며 철이 덜 든 아줌마라고 구박하더니만 이번 유치한 대치 상황에선 내 편이 돼줬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는 말에 낮의 감정이 치받쳐 "안 먹어" 하고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그러자 남편도 따라 들어왔다. [중앙포토]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는 말에 낮의 감정이 치받쳐 "안 먹어" 하고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그러자 남편도 따라 들어왔다. [중앙포토]

그래서 우울한 기분이 싹 풀렸다. 유치하지만 이럴 때 사랑이 싹튼다. 배는 고픈지라 혹시나 하고 한국에서  비상용으로 갖고 온 컵라면과 햇반을 데워 먹었으며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다니 하며 행복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눈만 뜨면 전쟁이었지만 아이들과 대치할 땐 어떤 유치하고 쪼잔한 상황에서도 한편이 되어 주기로 그날 밤 우리는 무언의 약속을 했다. 훗날 살아보니 부부만 동지가 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들이 방으로 찾아 왔다. “엄마, 죄송해요.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은데 이해하시고 오늘은 정말로 잘 모시고 다닐게요. 근데 엄마는 왜 삐지신 거예요?” 당시엔 어이가 없고 한심하다고 느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내가 가장 싫어했던 노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는구나 반성도 한다. 하지만 어른이나 아이나 감정의 동물인지라 순간 섭섭하고 화가 나면 통제가 바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 않은가?

아들의 물음에 우습기도 하고 겸연쩍어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남편이 나섰다. “어이 아들~ 간단하게 말해서 줄라믄 말이다. 홀딱 벗고 주라 이 말이제. 하하하.”

아들에게 옛날얘기 들려주며 중재에 나선 남편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남편만 있으면 살맛 난다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중앙포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남편만 있으면 살맛 난다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중앙포토]

그러면서 옛날이야기 책에 나오는 늙은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하며 화해를 시도했다. 나이든 아버지가 마당에 들어온 까치를 보며 아들에게 “저게 무어냐?” 물으니 “까치입니다” 대답했는데,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묻자 아들이 짜증을 내더라는 이야기이다. 그 책의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네 살배기 내 아들이 “아빠, 저게 뭐야?”라고 오늘은 23번이나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번 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했다. 아마도 우리 아들은 천재인가 보다.”

함께 여행을 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부른 투정이긴 하다. 부모랑 싸우려고 덤비는 자식은 나쁜 자식이지만 자식이랑 싸우는 부모는 바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부모다워야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먼 인생이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남편만 있으면 살맛 난다는 것을 느낀 어느 여행 날이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