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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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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에서 중.장년이 '이름 없는 영웅들'을 모른다고 했다간 간첩이란 소리를 들을 거다. 1979~81년 20부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북한판 '007 시리즈'다. 한국전쟁 말기 적후(敵後.남한)로 밀파된 북한 스파이들의 정탐(첩보) 활동을 그렸다.

주인공은 유림. 평양의 '모란봉' 지령을 받는 '두만강'이다. 영국 언론사 종군기자로 서울에 침투한 그는 외교가와 군부를 파고들어 미군의 대공세 작전계획을 빼낸다. 이에 힘입어 북한군이 선제 타격으로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전편을 흐르는 유림과 미 8군 반탐(방첩) 책임자 간의 두뇌게임은 백미(白眉)다.

이 허구의 세계에 65년 월북한 주한미군 젠킨스가 미군 장교로 나온다. 미 정보 당국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그의 본업도 이 영화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북한 공작원 영어 교육 담당이다. 그는 78년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소가 히토미와 가정을 꾸린다. 그녀 역시 공작원 교육계. 소가는 2002년 홀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1차 북.일 정상회담 직후다. 젠킨스는 2년 뒤 두 딸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와 정착의 닻을 내렸다. 소가가 끌려갔던 그 니가타현의 외딴섬에.

소가는 가족과 합류하자 북한의 납치 공작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올 초엔 "77년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공작원이 신광수"라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요코타는 남편이 피랍 한국인 김영남으로 밝혀진, 납치 피해의 상징적 인물이다.

신광수는 일본에선 '공공의 적'. 70~80년대 일본과 남한을 들락거리면서 '점'과 '점'을 이은 거물 스파이다. 80년엔 오사카의 중국집 요리사 하라를 납치하는 공작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남한에서 하라 행세를 하며 거점을 구축하다 85년 안기부에 덜미를 잡혔다. 88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99년 밀레니엄 특사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로 북송돼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일본 경찰은 2월 그에게 체포장을 발부했다. 잡은 자와 잡힌 자, 허구와 현실을 구분키 어려운 비극이다.

정부가 납북자 송환에 팔을 걷어붙일 태세라고 한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저울질한다는 소식이다. 지난 세기 부(負)의 한 역사를 청산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사를 들추기보다 납치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우선하는 이성적 접근이 필요한 때다. 그래야 납치 문제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