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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2. 이복형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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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복형 원규(左)와 12세 때 필자.

우리 어머니는 재취(再娶)였기 때문에 나는 이른바 서자(庶子)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10대 때부터 콤플렉스 자체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3남2녀를 두셨다. 맨위로 딸이 있고, 아들로서는 나의 아버지가 맏이다.

둘째 아들 즉 작은아버지 의묵씨는 체육인 고 민관식씨와 경기고 동기동창이다. 그는 증조부의 한량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시다가 1930년 대에 돌아가셨다. 그것도 방씨 집안의 DNA 영향이었겠지만 셋째 아들인 용묵씨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와 일곱 살 차이인 그는 해방 뒤 정치인 여운형의 참모로 활동하다 월북했다.

이화여전을 다녔던 막내딸 수복씨는 스피드스케이트 선수였으니, 그것도 방천왕둥이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의 첫 부인은 결핵을 앓았고, 남매를 낳기 전부터 요양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혼 결심을 한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안다. 서울에서 올린 두번째 신식결혼식은 무척 호사스러웠다고 들었다. 한 살 위의 이복 형, 누이와 10대 시절을 함께 보냈던 나는 "첩의 자식"이란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큰어머니는 병사했고, 누이는 중3 시절 피지도 못해보고 유명을 달리했다. 이복형과 나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복형과의 우애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불에서 뒹굴던 우애는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형과는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전쟁이 터진 직후인 9.29 수복 때까지 서울에 남아있던 나는 쌀을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집에 와 보니 형 편지가 덜렁 놓여있었다. 젊은 혈기에 의용군 지원을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도 비장했던 편지 내용이 기억난다.

"동규야. 조국의 앞날을 위해 떠난다. 부디 우리 가정을 돌봐주기 바란다."

형 소식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낙동강에서 전선이 교착된 무렵에도 그는 살아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소식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포로 석방 때 북한을 택했다. 살아있다면 그 형님은 72세다. 형을 얼마나 못 잊었던지 프랑스 유랑 시절에 그를 만나려는 시도를 했다. 1971년 무렵이었다. 당시 동백림 사건 직후인지라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당국의 허용 여부 따위는 내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동독의 북한 대사관을 찾으면 묘수가 있을 듯 싶었다. 결국 열차를 이용해 겁도 없이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다.

"잃어버린 내 형을 찾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곳의 북한 직원들이 저으기 당황하는 눈치였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내게 맥주와 안주 따위를 내놓으며 정중하게 대접하면서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한참을 숙의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끝내 벌걸음을 돌렸지만, 만일 그들이 오케이를 했다면 평양 방문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 건의 동백림 사건이 연출됐을 가능성 여부는 내 관심 밖이었다. "아, 우리 형님 그저 살아만 계시라요. 정신없이 사느라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못한 배추의 마음 만은 알아 주시라요."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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