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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북핵 폐기 뒤에도 불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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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극적인 북·미 회담 성공으로 북한이 핵무기, 핵 물질과 함께 핵 시설까지 없앴다 치자. 그럼 우리는 발 뻗고 잘 수 있나. 불행히도 핵심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 한 답은 “노(No)”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미래로 가 보자.

핵 시설 없애도 과학자의 지식은 남아 #전문인력 관리 안 하면 핵 재생산 가능

“202X년 5월, 미국의 대북정책에 분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극비리에 핵무기 재생산을 지시한다. 미국이 북한 내 민주화 운동을 도운 탓이다. 체제 보장을 약속했지만 미국은 인권 보호란 명분 아래 반체제 세력을 지원했다.

비록 핵무기를 해체하고 핵 물질까지 미국에 보냈지만 핵무기 재생산엔 아무 문제가 없다. 과학자들 머리에 노하우가 남아 있는 덕이다. 핵무기 원료인 우라늄 매장량은 북한이 세계 1위다. 우라늄 원석을 농축해 핵무기 원료로 바꾸는 원심분리기도 최소한 2009년부터 자체 생산해 왔다. 원심분리기는 높이 1~2m에 직경이 20여㎝에 불과하다. 웬만한 지하 벙커면 수천 대도 감춘다는 얘기다. 2000대를 1년 돌리면 핵폭탄 하나쯤 만들 농축우라늄 20㎏은 거뜬히 건진다.

게다가 플루토늄과 달리 우라늄을 쓰면 핵실험도 필요 없다.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북핵 폐기에 맞춰 주한미군이 철수한 건 오래전이었다. 북 공격 시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했던 안전핀이 뽑힌 셈이다. 1년 뒤 북한이 핵무기를 흔들며 위협해도 우리에겐 손쓸 방법이 없게 된다.”

이상이 암울하지만,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다. 트럼프 행정부가 언급했던 ‘영구적(permanent)’인 핵 폐기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이다. 지나친 비관론에 쩐 황당한 전망이 아니다. 비핵화를 택한 리비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토대로 짠 시나리오다.

2003년 핵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8년 뒤 서방의 지원을 받은 반군에 살해된다. 소련 연방 해체 후 4200여 기의 핵폭탄을 러시아에 넘긴 우크라이나는 이 대가로 평화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빼앗았다. 이 사건 후 이 나라에서 핵 재무장 요구가 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사례로 볼 때 3000여 명의 북핵 기술자를 해외로 보내거나 철저히 관리하지 않는 한 북핵 위협은 없어지지 않는다. 미국이 1991년 샘 넌,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 주도로 ‘협력적 위협 감축(CTR)’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소련 연방 국가 및 리비아의 핵 두뇌를 관리해 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제도에 따라 미국은 실업자가 된 핵 과학자들이 평화적 분야에서 일할 수 있게 큰돈을 댔다. 사업 중에는 공동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서방 과학자와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동태 감시가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미래의 핵 위협을 막으려면 과학자 관리가 핵심 중 핵심이다. 그러기에 최근 미국이 이들의 해외 송출을 요구했다 북한이 거절했다는 보도는 그럴싸하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영구적인 비핵화 얘기가 쑥 들어갔다. 어느 틈에 핵 과학자 문제엔 별말이 없는 ‘완전한(complete)’ 비핵화로 미국 입장이 후퇴한 느낌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이 문제를 깐깐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남쪽에서 북한의 핵 과학자를 받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핵무기 기술을 거저먹으려 한다는 비난이 국제사회에서 빗발칠 게 뻔하다.

그러니 최소한 바늘 끝도 안 들어갈 핵 과학자 관리 시스템을 마련토록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 이 마지노선도 못 지키면 우리는 언제 북핵이 재등장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 떨며 살 수밖에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