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 "한국 아름답지만 어두운 면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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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어머니 김영희씨와 함께 12일 출국하는 하인스 워드 선수가 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혼혈인 어린이 여러분, 희망을 잃지 마세요."

혼혈 스포츠 스타 하인스 워드(30)는 11일 오후 5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마지막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9박10일간 일정을 마치고 12일 한국을 떠난다. 워드는 "이번 여행으로 따뜻한 성원과 사랑 속에서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됐으며 내 꿈이 실현됐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 돌아가더라도 혼혈인 차별 철폐를 사명으로 삼고 많은 시간과 역량을 투자하겠다"고 다짐했다. 워드는 기자회견 내내 특유의 '살인미소'를 접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는 혼혈인 재단 설립을 구체화하기 위해 다음달 한국을 다시 찾겠다고 약속했다.

워드는 "한국은 참 아름다운 나라지만 어두운 면이 있었다"며 "어머니가 겪었던 인종 편견이 그 어두운 면"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한국의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인종 편견과 갈등을 극복해 더 나은 한국을 만드는 데 적극 노력하겠다"고도 강조했다.

한편 워드의 방한은 그동안 차별받아 왔던 국내의 혼혈인 문제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혼혈 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되기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혼혈인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하면서 혼혈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바로잡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한다.

■ 워드가 심은 '희망'
'다문화 포용' 교과서까지 바꿔

국내 혼혈 청소년들은 "워드의 모습을 보고 혼혈이 장애가 아니라 개성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희망을 표출했다. 백인계 혼혈인인 양모(17)양은 "워드 아저씨를 보며 당당한 한국인으로 우리 사회에서 꼭 한몫을 해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혼혈인을 자녀로 둔 국제 가족에도 워드의 방한은 '희망의 빛'이 됐다. 파키스탄인과 결혼해 쌍둥이 엄마가 된 정미숙(37)씨는 "더 이상 혼혈이 흠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축구를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도 워드 선수처럼 훌륭한 스포츠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워드의 방한은 단일민족을 강조해 온 교과서 내용까지 바꿀 전망이다. 교육부는 2007년부터 초.중.고 교과서를 개정해 다른 인종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겠다는 방침을 최근 내놓았다.

정치권에선 '혼혈 이슈'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대학 입학 할당제 등이 포함된 '국제결혼 가정에 대한 차별 금지법'제정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한나라당은 '혼혈인 및 혼혈인 가족 지원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청와대는 혼혈인 관련 종합 대책을 4월 말께 발표한다.

■ 한국사회의 '반성'
"차별의 대물림 끊어주자"

전문가들은 "워드 열풍에도 불구하고 혼혈인을 바라보는 배타적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혼혈인에 대한 차별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혼혈인 지원단체인 '하이패밀리' 여한구 사무총장은 "특히 예비 사회인인 혼혈 청소년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기에 겪은 편견과 차별이 이후 정상적 사회 생활까지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혼혈 청소년들은 '왕따'와 빈곤 등을 이유로 정상적 학교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흑인계 혼혈인인 이모(15)양은 '피부색이 까맣다'는 이유로 따돌림에 시달리다가 지난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외국인 학교로 옮기려 했지만 비싼 학비(한 달에 약 100만원)를 낼 수 없어 포기했다. 이양은 수개월째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이양의 경우처럼 혼혈 청소년들은 기본적 학교 교육조차 마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한 실정이다.

현재 국내에서 혼혈 청소년을 지원하는 단체는 펄벅재단이 유일하다. 연평균 180여 명에게 한 달에 5만~50만원씩 생계비와 교육비를 지원하는 정도다. 재단 운영비는 주한미군, 재단 미국 본사, 개인후원금 등에서 충당한다.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다.

정강현.이충형 기자 <foneo@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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