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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날던 매향리 예배당, 문화발전소로 키워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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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기일 ‘재밌는 일 연구소’ 소장

55년간 사격·폭격장으로 쓰인 곳
낡은 교회 그대로 스튜디오 활용
총탄조각 전시 열고 연극도 준비
“주민들 쉬어가는 사랑방 만들 것”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이기일 총괄은 다음 달 개인전에서 선보일 조각의 재료인 총알에 광을 내며 매향리에 빛이 깃들기를 바랐다고 했다. 1951년 매향리 최초의 폭격장이던 작은 무인도 농섬에서 주워온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기일 총괄은 다음 달 개인전에서 선보일 조각의 재료인 총알에 광을 내며 매향리에 빛이 깃들기를 바랐다고 했다. 1951년 매향리 최초의 폭격장이던 작은 무인도 농섬에서 주워온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가 건네준 명함을 한참 들여다봤다. e메일 주소 ‘propagandada@…’가 맨 위에 올라앉았다. 직함은 매향리 스튜디오 총괄 운영자이자 ‘재밌는 일 연구소(funny business lab)’ 소장이다. 이기일(51) 총괄 은 자신을 ‘문화 조각가’이자 ‘예술 서비스 맨’이라고 소개했다.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지만 30년쯤 작업을 하다 보니 제가 직접 제작하는 것보다 남의 창작물을 수집한 뒤 그걸 이리저리 엮어서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았어요. 2012년 기획한 ‘비틀스 50년-한국의 비틀스 마니아’전은 호응이 좋았어요.”

그는 대한민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쌓인 물건의 기억을 유추해 재조합하거나 또 다른 얘기를 만드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 취향이 그를 매향리로 이끌었다. 경기창작센터 작업실 입주 작가로 들어간 인연으로 ‘경기만 에코뮤지엄(ecomuseum)’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에코뮤지엄은 서해안의 낙후된 지역, 역사가 깃든 마을에서 문화예술 재생사업을 벌여 새 가치를 일으키는 프로젝트다.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밴 땅이죠. 1951년부터 2005년까지 55년 동안 주한 미 공군의 사격장과 폭격장으로 쓰인 곳입니다. 연중 250일 이상 사격과 폭격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미 공군기가 땅으로, 바다로 무차별 포탄을 떨어뜨리니 오폭으로 집이 파괴되고 소음으로 난청이 일상화됐죠. 삶의 터전이 유사 전쟁터였던 셈입니다.”

이 총괄은 2016년 매향리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마을 주민들과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지 못한 고령의 어르신이라 대화가 힘들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외지인에 대한 경계인가 싶어 진땀을 흘렸다는 것이다. 폭격 소리가 하도 커서 늘 소리 지르듯 말하는 게 습관이 돼 그렇다는 걸 나중에 알고 가슴이 찡했다고 털어놨다.

2016년 30여 년 방치됐던 매향교회 옛 예배당에 불이 들어오며 매향리 스튜디오가 개관했다.

2016년 30여 년 방치됐던 매향교회 옛 예배당에 불이 들어오며 매향리 스튜디오가 개관했다.

“그런 매향리의 아픔을 문화예술로 치유하고자 마음먹었지만 처음엔 막막했죠. 그런 저에게 영감을 준 것이 공간이었어요. 스튜디오 자리로 나온 건물은 1969년 건립된 매향교회의 옛 예배당이었는데 84년 새 교회가 세워지면서 방치돼 있었죠. 낡고 초라한 모습이 매향리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듯 했어요. 주민들조차 잊고 있던 폐허에 전기 배선 공사를 하고 불을 켜놨는데 건물 앞에 차들이 멈춰서는 겁니다. 30여 년 컴컴하던 곳이 환하니 뭔가 울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유지해 스튜디오로 만들었지요. 주민들이 매향리의 옛 모습을 기억하도록.”

그는 매향리 스튜디오가 “소음 없는, 마음의 불안 없는 매향리를 일구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평범한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 매향리의 평화라고 믿기에 주민들이 늘 놀러와 쉬고 웃고 즐기다 가는 마을회관이나 사랑방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해 여름, 폭격 훈련이 최초로 이뤄진 무인도 ‘농섬’에 들어가서 포탄 파편과 총알을 주우며 현장을 느끼는 생태역사탐방을 했어요. 어르신께 여쭈니 정작 농섬에 가보신 분이 없어요. 먹고 사는 일에 치여서 거기 가볼 엄두를 못 내신 거죠. 스튜디오 개설 3년 차를 맞는 올해는 주민이 주인공이 되는 매향리 소재 연극을 만들 겁니다. 농섬 야유회, 특산물을 나눠먹는 음식축제도 기획 중이고요.”

이 총괄은 다음 달 6일부터 서울 연희동 비컷(B. CUT)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농섬에서 수거한 50년 묵은 포탄과 총알을 광내서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낡은 총알의 껍질을 벗기고 반짝반짝 윤나게 문지르며 매향리에 새 빛이 깃들기를 빌었다”고 말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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