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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식 사회복지 '라인란트 모델' 수술의 두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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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프랑스의 한 학생이 6일 파리 북역 철로 위에서 최초고용계약(CPE)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신발에 'CPE 철회'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파리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을 대표하는 독일과 프랑스는 근로자를 중시하는 사회시스템을 가졌다 해서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그러나 유연한 노동시장을 앞세운 미국 경제가 지구촌을 압도하면서 사회복지를 앞세운 유럽의 '라인란트 모델'은 수술대에 올랐다. 사회 전체가 고비용 구조에 빠져들면서 장기 불황에서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난국을 타개하는 두 나라의 자세는 크게 달랐다. 1998년부터 꾸준히 사회개혁 정책을 밀어붙인 독일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단계에 들어선 반면 이제야 팔을 걷어붙인 프랑스는 시위와 파업 열병에 몸살을 앓고 있다.

독일에선
'2년 써 보고 채용' 좌우 대연정 개혁
학생들 "취업 앞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새 노동법에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벌어졌던 4일 독일 베를린 달렘에 위치한 가리슈트라세 39번지. 독일 최대 규모인 베를린 자유대학(FU)은 부활절 방학을 앞두고 한산했다.

그러나 도서관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책에 머리를 파묻고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한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귀찮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공부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게다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한 주에 20시간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식 학사제도를 도입한 뒤 졸업 조건이 훨씬 까다로워졌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다"고 했다.

◆ 취업이 최대 관건=기독교 민주대학생 연합 의장인 퀴스터스는 "요즘 독일 대학생들에게선 68세대와 같은 강한 정치 성향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독일 대학에서 시위 풍경이 사라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직업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학생들이 가능한 한 학업을 빨리 끝내기 위해 공부에만 몰두한다. 또한 과거 대학에서 벌어졌던 시위와 파업이 대부분 실패했기에 학생들 사이엔 체념도 넓게 퍼져 있다. 전국적인 연대감도 찾아볼 수 없다."

1960년대 학생시위의 메카였던 FU에서 학생자치단체를 이끌고 있는 게오르게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주의가 늘어나고 있다"며 "대학생 자치회 선거의 투표 참여율은 12%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 8년 전 시동 건 개혁정책=이런 변화의 시동은 8년 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걸었다. '노이에 미테(신중도)'를 내세우며 98년 집권한 슈뢰더의 중도좌파 정권은 전통적 지지층인 노조의 반발을 무릅쓰고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슈뢰더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난해 11월 출범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좌우 대연정은 더 강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메르켈 정부는 고용주가 2년간 정식고용을 하지 않고 직원을 채용할 수 있도록 했다. 2년 안에는 자유롭게 자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고 법정연금보험의 기여율을 높이는 등 기존 복지 혜택을 축소하는 쪽으로 손을 댔다. 이런 정책 변화에 대해 일부에서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프랑스에서와 같은 대대적인 저항은 없었다.

이전에 슈뢰더 정권도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해고 제한 완화 대상을 5명 이상 업체에서 10명 이상 업체로 상향 조정했다. 추천받은 일자리를 실업자가 특별한 사유 없이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주는 '하르츠Ⅳ' 법안도 도입했다. 건강보험의 본인 부담을 늘리고 혜택을 줄이는 등 사회복지제도도 수술했다. 슈뢰더의 사민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의 이탈로 지난해 선거에서 메르켈 후보에게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대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은 여전히 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슈피겔 등 언론들은 "메르켈의 리더십으로 경제가 살아나는 등 사회 전반에 낙관론이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프랑스는
'2년 내 해고 가능'우파 정부 입법하자
학생들 "파업 앞으로"

"'프랑스 병'이 깊어가고 있다. 과잉 복지로 재정 씀씀이는 엄청난데 경기침체로 세금이 안 걷혀 나라살림이 거덜날 지경이다."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경고다. 위정자들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지만 개혁 의지가 약한 탓에 문제가 누적되고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우파 정권은 1995년 집권했다. 10년 넘게 집권하면서 근로자를 지나치게 감싸는 사회시스템은 제대로 손대지 못했다. 26세 미만의 젊은이를 채용한 기업에 첫 2년간 해고를 자유롭게 한 최초고용계약(CPE)제를 도입했지만 학생과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쳐 멈칫거리고 있다.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2002년 프랑스의 사회보장비용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30.6%에 달했다. 25개 EU 회원국 중 스웨덴(32.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91년 이후 연평균 GDP 성장률도 2% 선에 겨우 턱걸이하면서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있다.

◆ 개혁 시도 번번이 실패=사실 프랑스 정부는 이런 문제를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여러 번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국민의 반발에 부닥쳐 좌절했다. 그동안 우파 정부가 시도한 수차례 개혁 중 2003년 연금개혁이 그나마 손에 꼽히는 성공사례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라크 정부는 실업 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정했다.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다. 기업주에게 투자의욕을 고취시키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8월 새 고용계약(CNE)을 도입했다. CPE의 전신인 CNE는 근로자 20인 이하 기업을 대상으로 신입사원을 뽑은 뒤 2년 동안 아무런 해고요건을 부과하지 않는 노동계약이다.

채택 당시 르 몽드는 CNE를 "(사회주의 국가 프랑스가 감행한) 자유주의적 도박"에 비유했다. 이후 프랑스 경제는 불과 6개월 만에 실업률이 0.6%포인트나 떨어졌다. 이에 고무된 프랑스 정부는 올 1월 근로자 수 20인 초과 사업장의 26세 미만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CPE 입법 계획을 발표했다.

◆ '경쟁은 싫다'=하지만 젊은이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평생고용을 프랑스식 사회모델의 자랑으로 여겨온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충분한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해고할 수 있게 한 법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많은 프랑스인에게 CPE는 라인란트 모델의 포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년을 보장받고 편히 살아온 프랑스인들은 무한경쟁을 의미하는 이런 미국식 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제 여론조사기구인 글로브스캔에 따르면 세계 주요 선진국 중 프랑스 사람만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르 몽드는 지난 연말 실시한 프랑스인 의식조사를 토대로 이렇게 꼬집었다. "프랑스인의 65%가 실업을 걱정하고 영국과 덴마크의 높은 성장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복지모델을 고수하겠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 라인란트(Rheinland) 모델=라인강이 흐르는 서유럽 지역의 국가(라인란트)들이 채택한 사회복지 모델. 성장보다는 복지를 강조하며 촘촘히 짜인 사회보장제도를 자랑한다. 프랑스와 독일이 대표적인 나라다. 그러나 그런 제도를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 기업과 국가 경쟁력은 뒷걸음질쳤다. 결국 지금은 개혁 수술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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