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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선수도 믿고 기용 … ‘코트 CEO’의 형님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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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올 시즌 프로농구 서울 SK를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끈 문경은 감독. 그는 ‘스타 출신 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다고 했다. 25일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는 문경은 감독. [우상조 기자]

올 시즌 프로농구 서울 SK를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끈 문경은 감독. 그는 ‘스타 출신 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다고 했다. 25일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는 문경은 감독. [우상조 기자]

문경은(47)은 대한민국 농구의 대명사다. 연세대 재학시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후배 서장훈(44)과 함께 연세대를 이끌면서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자로 변신한 뒤에 그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2011년 프로농구 서울 SK 감독을 맡았지만 좀처럼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령탑 맡아 첫 우승 맛본 SK 문경은 #선수들과 자주 대화 거리감 좁혀 #제안·요구사항 팀 운영에 반영 #챔프전 기간 중 매일 밤 상대 분석 #전술의 깊이 더하는 게 감독 역할 #“스타 출신 지도자는 실패” 편견 깨

속설처럼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명감독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묵묵히 후배들을 이끄는 형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감독을 맡은지 7년 만인 올시즌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25일 문경은 SK 감독을 만나 ‘형님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지난 10일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SK는 원주 DB에 무릎을 꿇었다. 초반 2연패를 당하면서 올해도 우승은 물건너 간 듯 했다. 위기에 몰린 SK의 문경은 감독은 코칭스태프와 소줏잔을 기울이며 쓰린 속을 달래다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최)부경(29·2m)아, (최)원혁(26·1m83cm)이 데리고 잠깐 건너와라.”

18년 만에 SK의 프로농구 챔프전 우승을 이끈 문경은 감독이 25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18년 만에 SK의 프로농구 챔프전 우승을 이끈 문경은 감독이 25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제자들과 마주한 문 감독은 “DB의 주득점원인 외국인 선수 디온테 버튼(24·1m93cm)을 막지 못해 답답하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팀 내에서 수비가 가장 뛰어난 두 선수와 함께 고민을 나누며 해답을 찾으려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프로 4년차 가드 최원혁이 조용히 말했다. “감독님, (버튼을) 저에게 맡겨주세요. 막을 수 있다고는 말씀 못 드려요. 대신 최대한 괴롭히고 귀찮게 할게요.”

최원혁은 정규리그 35경기에서 경기당 6분26초를 뛰며 1득점과 1.1어시스트, 1.1리바운드를 기록한 식스맨이다. 하지만 문 감독은 ‘B급 선수’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3차전부터 최원혁의 출전시간을 늘려 버튼을 막게 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최원혁이 하프라인 너머에서부터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자 버튼의 득점력이 확 떨어졌다. 1·2차전에서 38점과 39점을 기록하며 DB의 승리를 이끈 버튼은 이후 4경기에서 25점(3차전)·20점(4차전)·28점(5차전)·14점(6차전)에 그쳤다.

최원혁이 나선 이후 단 한 번도 30점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버튼이 꽁꽁 묶인 사이 SK는 네 경기를 모두 이겨 4승2패로 승부를 뒤집고 정상에 올랐다. SK는 1999~2000시즌 이후 18년 만에, 통산 두 번째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문경은 감독은 사진촬영 내내 지나가는 시민들의 우승 축하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는 문 감독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우상조 기자

문경은 감독은 사진촬영 내내 지나가는 시민들의 우승 축하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는 문 감독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우상조 기자

문경은

문경은

문경은 감독은 챔프전 역전 드라마를 이끈 비결로 ‘최원혁과 나눈 소주 한 잔’을 언급했다. 문 감독은 “기록만 보면 원혁이는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선수다. 하지만 눈빛에서 다부진 각오와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면서 “‘감독이 원하는 걸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니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해보라’며 등을 두드려줬다”고 밝혔다.

현역 시절이던 2000~01시즌 삼성 소속으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뒤 17년 만에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한 그는 "우승 직후 눈물을 흘린 건 ‘큰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스타 출신 지도자는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과 맞서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SK 우승의 원동력으로 꼽히는 문경은식 ‘형님 리더십’의 실체는 뭘까. 문 감독은 "한 단어로 정리하라면 ‘신뢰’를 꼽겠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가 선수를 믿는 건 기본이다. 중요한 건 선수들이 감독을 믿고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우리 팀은 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문 감독은 틈날 때마다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팀 운영을 하면서 선수들의 제안이나 요구사항을 반영했다. ‘감독이 선수들의 말을 경청한다’는 걸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전술적 깊이를 더하기 위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 감독은 "감독의 전술 역량은 선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된다”며 "시즌을 더할수록 밤늦게까지 상대팀을 분석하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챔피언결정전 기간에도 상대팀 분석 자료를 매일 밤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장 겸 리딩가드 김선형(30·1m87cm)은 "챔프전 3차전을 앞두고 사우나를 함께 하던 감독님께서 ‘1~3쿼터 출전 시간을 줄일테니 체력을 아꼈다가 승부처가 될 4쿼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라’고 지시하셨다. 경기 중 한 때 20점차까지 뒤져 초조했지만, 감독님은 정해진 계획을 바꾸지 않으셨다”면서 "역전승을 거둔 뒤 ‘감독님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틀림 없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했다. 김선형은 3차전에서 3쿼터까지 단 한 점도 넣지 못했지만, 4쿼터와 연장전에서 각각 11점과 4점을 몰아넣으며 SK의 대역전승(101-99)을 이끌었다.

18년 만에 SK의 프로농구 챔프전 우승을 이끈 문경은 감독이 25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인근에서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18년 만에 SK의 프로농구 챔프전 우승을 이끈 문경은 감독이 25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인근에서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일부 농구팬들은 문경은 감독을 ‘문애런’이라고 부른다. ‘문경은’과 ‘애런 헤인즈(37·1m99cm)’를 합성한 말이다. ‘문 감독이 외국인 선수 헤인즈를 편애한다’는 비아냥을 담은 표현이다. 문 감독은 "내가 헤인즈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댓글을 종종 본다”면서 "헤인즈는 한국의 정서를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늘 꾸준하다. 내가 헤인즈를 편애하는 게 아니라 헤인즈가 빠르고 공격적인 농구를 추구하는 내 전술과 잘 어울리는 거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문선형(문경은+김선형)이기도 하고 문원혁(문경은+최원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 시즌을 통해 ‘문경은식 농구’의 지향점이 명확해졌다. 다음 시즌에는 더 화끈하고 재미있는 경기로 침체된 프로농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다짐했다.

◆문경은(47)

서울 SK 감독은 선수 시절 ‘람보슈터’라 불렸다. 광신상고와 연세대를 나온 문 감독은 이상민, 서장훈과 함께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프로선수 시절엔 2001~02시즌 삼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1~12시즌 SK 감독대행을 거쳐 2012~13시즌 정식 감독에 올랐다. 7시즌만에 첫 우승을 달성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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