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 피겨왕자의 퍼레이드와 쓰레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지난 일요일인 22일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역 주변 도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0만8000여 명의 구름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일본의 ‘피겨 왕자’ 하뉴 유즈루(羽生結弦)의 카퍼레이드가 오후 1시30분부터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카퍼레이드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호텔과 레스토랑, 심지어 미용실 예약까지 일찌감치 마감될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행사장 주변은 이미 전날 밤부터 북새통이었다. 하뉴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수백명의 팬들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도로에서 밤을 지새운 탓이다. 이들은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으로 식사를 현장에서 해결했다.

카퍼레이드 당일엔 기습적인 더위까지 센다이를 덮쳤다. 4월 기온으로는 관측 사상 최고인 29.9도까지 올라갔다. 팬들은 “양산과 음료수 없이는 조금도 버틸 수 없을 정도”라며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었다. 실제로 몰려든 팬들의 손마다 각종 음료수가 들려있었다. 역 주변 1.1㎞ 구간에서 40여분간 진행된 카퍼레이드는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하뉴는 피겨 연기에서 보여줬던 깜찍하고 귀여운 포즈로 팬서비스를 했고, 팬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성을 질렀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런데 카퍼레이드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11만 명의 팬이 돌아간 뒤 거리의 모습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도로엔 쓰레기가 거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날 행사장 주변에는 자원봉사자 460명과 미야기현·센다이시 직원 530명 등 모두 990명이 쓰레기 수거를 위해 대기 중이었다. 카퍼레이드 뒤 이들이 수거한 쓰레기를 전부 모았더니 90L짜리 사업자용 쓰레기 봉투 6개 분량에 불과했다. 45L짜리 가정용 봉투로 환산하면 12개에 불과했다. 전날 밤부터 도로에서 먹고 자다시피 했던 팬들의 열기, 음료수 없이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가혹했던 봄 더위 등의 악조건을 고려하면 쓰레기양은 이례적으로 적었다.

일본 언론들은 “트위터를 통해 ‘행사 종료 뒤 쓰레기를 꼭 회수하자’고 제안하는 등 하뉴의 팬들이 사전에 분위기를 잡은 것이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SNS엔 “바람직한 팬의 모습” “배우고 싶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일본 관련 정보를 다루는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도 “역시 하뉴의 팬은 다르다”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11만 명이 남긴 쓰레기봉투 단 6개는 품격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평소에 하지 않던 걸 갑자기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