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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원칙 손 뒤집듯 바꿔 … 노조 버티기 자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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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STX조선해양이 자구안에 대한 노사 확약서를 제출했어야 할 마감시한은 지난 9일 밤 12시였다. STX조선의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의 이동걸 회장은 지난달 8일 “한 달 내 노사 확약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법정관리(법원 주도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겠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STX조선은 조합원 설명회 등 노동조합 내부 절차를 이유로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컨트롤타워 실종된 정부 구조조정 #자구안 제출 기한 넘긴 STX조선 #“법정관리” 공언 몇시간 안 돼 번복 #구조조정 주도권 금융위 → 산업부 #금융 외에 고용·지역 논리 끼어들어 #한국GM 등 다른 곳에 악영향 우려

이 회장 공언대로라면 마감을 지키지 못했으니 법정관리 신청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산은은 10일 새벽 “법정관리를 신청키로 했다”고 하더니 몇 시간 지나선 “노사 확약서가 제출되면 산업경쟁력강화관계장관회의(산경장 회의)에서 검토해 처리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데드라인을 지키지 못했는데도 법정관리가 진행되지 않자 현장에선 ‘4월 9일’로 못 박은 마감시한의 권위부터 의심하는 분위기다. 금호타이어의 경우 노사 협상 마감시한으로 설정됐던 지난달 30일은 채권단의 자율협약이 종료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시한을 넘기면 더는 채권단 지원이 불가능해 회사가 버틸 수 없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STX조선은 마감시한을 기해 만기 도래하는 채권이 없었다.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은 적도 없어 마감시한 이후 채권단 지원이 끊길 가능성도 없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STX조선 관계자는 “정부는 애당초 지키지 않아도 될 날짜를 마감시한으로 제시했다”고 토로했다.

채권단 관계자도 “9일이라는 시점이 언제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회사 안에 현금(올 2월 말 기준 1475억원)이 있기 때문에 9일을 넘긴다고 당장 회사가 부도나는 것은 아니다”며 “그걸 노조나 채권단도 모두 알기 때문에 노조는 버틸 때까지 버티면서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월 9일’을 최종 노사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건 경제사령탑인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그는 지난달 성동조선과 STX조선 처리 방침을 결정한 산경장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STX조선은 자력 생존이 가능한 수준의 고강도 자구 노력과 사업 재편에 대해 한 달 내, 즉 4월 9일까지 노사 확약을 하지 않을 경우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회의 직후 기자들에게 “원칙대로 처리한다는 건 법정관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마감 시한인 9일 김 부총리는 이 사안에 대해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약식 입장만 표명하는 데 그쳤다.

종잡기 어려웠던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스탠스도 구조조정 원칙에 불신을 불렀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구조조정의 주도권이 금융위원회에서 산업통상자원부로 이동했던 지난해 12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금융 논리 이외에 산업·지역·고용 측면도 보겠다는 새 구조조정 기조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연초 대우조선 옥포조선소를 찾아가 “조선 경기가 곧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위기에 몰린 STX조선 등 조선업계는 지원을 받아 다시 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성동조선은 법정관리행이 결정됐고, STX조선에 요구한 자구안은 불과 석 달 만에 더욱 가혹해졌다. 지난해 11월 산업은행은 ‘고정비 30% 삭감’을 자구 목표치로 제시했지만 올해 3월 산업부 주도의 산업컨설팅 이후에는 이 기준이 ‘고정비 40% 삭감’으로 불쑥 올라갔다.

STX조선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에 산업과 고용 측면을 두루 반영한다고 했을 때는 자구 요구안이 좀 더 완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며 “수정된 자구안대로면 생산직 근로자가 200명밖에 남지 않아 지속 가능 경영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의사가 제시한 처방전을 보고도 환자들이 병이 나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상황이 생긴 격이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원칙을 스스로 깨니 노조가 그런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라며 “향후 한국GM 등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GM의 경우 노사 교섭 종료 시점으로 지난달 30일을 못 박았지만 이미 이 시한을 넘긴 상태다.

박해호 한국GM 부장은 “산업은행과 GM 본사의 자금 지원 전제조건은 노사가 합의한 자구안 마련이지만 시간만 흐르고 있다”며 “산업은행의 실사 결과가 나오는 이달 20일 전후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본사가 신차 배정 취소나 한국 시장 철수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김도년·고란 기자, 세종=박진석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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