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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는 사우디, 러는 터키에 원전 지원…중동 핵 경쟁 우려

중앙일보

입력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왼쪽)가 지난달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선 사우디 원전 건설 문제가 논의됐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왼쪽)가 지난달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선 사우디 원전 건설 문제가 논의됐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살만(32) 왕세자가 20일간 미국 전역을 돌아본 뒤 8일(현지시간)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예멘 내전, 시리아 문제, 이란 핵협정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이어 스페인도 방문한다.

사우디 빈살만, 85조원 들여 원전 16기 건설 포부 #일자리 급한 트럼프, 우라늄 농축 허용 가능성 제기 #빈살만 "이란 핵무장하면 우리도" 핵무기 포석인가 #러-터키-이란 vs 미-사우디-이스라엘 대립 심화

 빈살만의 광폭 외교와 관련해선 특히 원자력에 대한 투자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사우디가 이란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비해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사우디, 이스라엘이 러시아, 터키, 이란과 대립하는 구도가 강해지면서 중동에서 핵무기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빈살만은 향후 25년 동안 원자력 발전소 16개를 건설하기 위해 800억 달러(약 85조5000억원) 이상을 쓸 계획이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의 발전과 자동차 시장의 변화를 고려할 때 세계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보고 가능한 한 빨리 비축유를 통해 돈을 벌려 한다고 본다. 기술 및 오락 서비스 등으로 경제를 다각화하려는 빈살만은 현재 2개 원자로 건설을 위해 10개국 이상의 회사들과 협의 중인데, 미국 업체들이 최우선 후보로 꼽히고 있다.

미국을 방문한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오른쪽)가 노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주시설을 제공하는 비영리기구 휴스턴 해비타트를 방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을 방문한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오른쪽)가 노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주시설을 제공하는 비영리기구 휴스턴 해비타트를 방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원전 기술을 사우디에 제공하려면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구매한 원전 장비를 향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 등에 대해 약속을 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와 사우디는 이미 논의를 진행 중이다. 릭 페리 미 에너지 장관이 지난달 초 런던에서 사우디 고위 관료들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미 온라인매체 복스미디어가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빈살만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원전 문제를 논의했을 것으로 본다.

 사우디의 원전 개발에 대해 핵확산 전문가들과 미국 내 일부 의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우디가 원전 기술을 활용해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인 중동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에서 거론하는 에너지 담론은 빈살만의 군사적 야망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있다.

 실제로 빈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18일 CBS 방송과 인터뷰에서 “사우디는 핵폭탄을 확보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도 빨리 그들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원전 기술을 제공하더라도 협정을 통해 사우디가 우라늄 농축이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협상에서 우라늄 농축을 허용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복스미디어는 전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자 이를 비난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사진을 찢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자 이를 비난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사진을 찢고 있다. [AP=연합뉴스]

 칼리드 알 팔리 사우디 에너지 장관은 지난해 12월 페리 장관과의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원자력 기술을 군사용으로 전환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핵확산 방지에도 적극적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에서 에너지부 차관보를 지낸 조 롬은 “햇볕이 잘 드는 사막 지대인 사우디는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해 전국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여건을 갖고 있다"며 “그런데도 사우디가 엄청나게 비싼 핵 옵션에 관심을 과도하게 기울이는 것은 에너지 관점에서 볼 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우디 원전 건설을 적극 지원하는 것은 다중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란 견제와 함께 미국 원전 건설회사들에 계약을 체결해주는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우디의 무기 개발을 눈감아 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 원전 건설회사 웨스팅하우스는 파산 절차를 밟고 있으며 수천개 일자리에 영향을 미쳤다.

 무기통제협회 소속 비확산 전문가 킹스턴 레이프는 “사우디 핵 프로그램의 주요 원동력은 이란과의 안보 경쟁"이라고 말했다.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중동의 라이벌인 시아파 맹주 이란이 향후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핵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핵 협상에서 철수하겠다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이란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핵무기 생산을 위한 조치에 나설 것이란 예측도 있기 때문이다.

 2030년 이후 자동으로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주요 제한이 해제되는 이른바 ‘일몰조항’도 사우디로선 고려 대상이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따라가겠다고 빈살만이 밝혔기 때문에 원전 프로그램을 잠재적인 군사 자산으로 보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대선 승리 후 첫 해외 방문으로 터키를 찾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터키 원전 건설에 합의했다.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대선 승리 후 첫 해외 방문으로 터키를 찾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터키 원전 건설에 합의했다. [EPA=연합뉴스]

 미국과 사우디,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결속을 다지는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선 승리 후 첫 해외 방문으로 지난 3일 터키를 찾았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지중해 연안 아큐유 지역에 러시아제 원전을 짓기로 합의했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터키공화국 설립 100주년이 되는 2023년 완공이 목표다.

 아큐유 원전은 러시아 국영기업 로스아톰이 건설할 예정이며 200억 달러 규모가 될 전망이다. 터키는 러시아의 장거리 S-400 미사일 방어시스템도 사들일 예정이다. 양국 정상은 4일에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까지 초청해 앙카라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시리아 내전 종식이 주 의제였으나 러시아-터키-이란의 연대가 강화되고 있다. 세 정상은 지난해 11월 러시아 소치에서도 3자 정상회담을 한 바 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부터)과 함께 앙카라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시리아 내전 종식 문제를 논의했다. 세 나라의 결속에 맞서 미국은 중동에서 사우디-이스라엘과 동맹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부터)과 함께 앙카라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시리아 내전 종식 문제를 논의했다. 세 나라의 결속에 맞서 미국은 중동에서 사우디-이스라엘과 동맹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특히 로하니 대통령은 지난 4년여 동안 푸틴과 11차례나 정상회담을 했다. 이란 핵 합의 이후 국제사회의 이란에 대한 제재가 풀리면서 러시아와의 경제협력도 늘었다.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각각 세계 4위, 2위인 이란은 러시아 기업과 에너지 공동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빈살만 왕세자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공동의 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적은 이란이다. 빈살만은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이 해결되면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의 미국, 푸틴의 러시아와 각각 손잡은 중동의 강자들이 핵무기 경쟁을 벌이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드리울 그림자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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