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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한 일 반복 안되게 “그 사람은 위험해” 알려주고 싶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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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당장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 이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를 후배들에게 ‘거긴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얼마 전 한 교수로부터 겪은 성희롱·성추행 사실을 학내에 폭로한 서울의 한 대학교 재학생 A(24)씨의 말이다. 회식 자리에서 제자들의 허리나 허벅지를 만지고, 블루스를 추자고 강요하는 교수의 모습을 보며 A씨는 “나는 누구에게도 ‘그 교수가 위험하다’는 안내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알리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피해자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잘못된 행동 책임있게 사과해야 #가해자 가족까지 공격은 부적절

학교 곳곳에는 교수를 규탄하는 대자보와 A씨를 지지하는 다른 학생들의 포스트잇들이 붙었다. 학교 윤리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됐고 다른 피해사례들도 모였다. 그는 “미투 이후 자기 일처럼 나서준 학우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크다”며 “하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고 했다.

지난 두 달여 간 수없이 터져나왔던 미투를 통해 피해자들이 제일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미투에 나섰던 피해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 『참고문헌 없음』에 참여했던 윤미경(가명)씨는 “어디에 말할 곳이 없었고, 그저 들어주길 원했다. 미투 운동은 그런 우리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주는 장이었다”고 털어놨다. 상대방 측으로부터 공갈협박·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를 당한 뒤 법원의 무혐의 처분을 받기까지 혼자 싸워야 했던 그는 “혼자였을 때 내 곁을 하나 둘 떠났던 지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이제 네가 바라던 세상이 왔다’고 말해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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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J교수의 성폭력 가해 사실을 알린 B씨는 “8년 전 그 일을 한순간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며 “미투 운동을 지켜보면서 계속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다 스스로 해결하려 나서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B씨의 용기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용기를 낳았다. 10년 전 졸업한 학생부터 17학번 재학생까지 “입학하면 선배들이 ‘J교수 면담 갈 땐 절대 맨다리로 가지 말고 뭐라도 두르고 가’라고 당부했었다”며 힘을 보탰다. B씨는 “그 교수는 10여 년 동안 너무 창창한 젊음을 많이 짓밟았다. 사과로는 모자란다. 징계 당하고 파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디음악계 내부 성폭력 문제를 고발한 신모(21)씨는 “괜히 나섰다가 이 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이런 걸로 망할 거였으면 망해도 된다’고 말해준 분들 덕분에 용기를 냈다”며 “인디음악 팬들이 더 편하게 공연 문화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디계 내 미투에 동참했고 지난달 26일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됐던 모 밴드의 드러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수의 여성에게 아티스트와 팬의 관계라는 특수성을 악용해 반 강제적으로 성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사과글을 올렸다.

지난달 12일부터 문화예술분야 성폭력 사건 관련 ‘특별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서울해바라기센터 박혜영 부소장은 “요즘들어 피해자가 오랫동안 묵혀온 사건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다들 ‘난 여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낸다. 공소시효가 지났더라도 이들을 사회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는 것이냐’고 호소한다”고 설명했다.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의 변호를 맡았던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가해 당사자 또는 그 사람의 가족에 대한 공격은 피해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는 가해자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고 가해자는 책임있는 자세로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상지·여성국·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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