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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를 다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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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브라질의 여성용 기성복 시장은 원래 유대인들 몫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농업 이민으로 물꼬가 트인 한국인의 브라질 이주를 계기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타고난 손재주와 근면성을 무기로 한국인들은 가장 힘든 작업인 봉제, 즉 바느질과 미싱일 하청을 도맡았다. 이어 어깨너머로 익힌 노하우와 조금씩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유대인들 점포를 하나 둘 잠식해 들어갔다. 지금은 원단 구매에서 디자인, 봉제 발주, 완제품 생산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는 한국인 업체들이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의 소용돌이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값싼 중국산 원단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린 한국산 원단이 자취를 감췄다. 한국인 업체들은 중국산 완제품의 덤핑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산 제품 가격에 맞춰 납품가 인하를 요구하는 브라질 대형 유통업체들의 압력이 커지면서 그 부담은 봉제 하청을 하는 볼리비아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불법 체류자가 대부분인 볼리비아인은 단추 한 개를 다는 데 1센타보(약 5원)라는 극심한 저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연루된 노동 분쟁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브라질 의류 사업의 수익성이 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사업 기회에 눈을 돌리는 교민들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대안을 못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는 아직 개발의 여지가 많은 '기회의 땅'이라는 데 교민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브라질은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32배에 달하는 광활한 국토와 1억8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다.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도 한반도 넓이의 13배다. 아르헨티나의 23개 주 가운데 10개 주가 남한보다 면적이 넓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미개발 상태로 방치된 팜파스(대평원)가 끝없이 펼쳐진다. 각종 식량자원과 광물자원이 아직도 개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고,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 남극의 빙하까지 천혜의 관광자원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이민 역사가 100년이 넘는 일본은 이미 남미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브라질 내 일본계 인구만 100만 명이 넘는다. 이민 6세대까지 내려가면서 현지에 완전히 동화된 일본계 이민들이 정치.경제.법조.언론 등 각계에 포진해 있다. 자원 외교에 혈안이 된 중국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남미 각국에서 중국계 이민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고,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을 찾는 중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 정부는 100만 명의 중국인 이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중남미 전역의 한국인 이민은 아직 10만 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국적기가 취항하지 않는 유일한 대륙이 남미다. 드넓은 기회의 땅을 놀리고 있는 셈이다.

중남미에 좌파 바람이 불고 있다지만 전통적 의미의 좌파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정치적 포퓰리즘, 자원 민족주의가 뒤섞여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실익을 구별하는 실용적 접근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가 반미(反美)와 반(反)신자유주의를 외치고 있지만 국내 정치용 립서비스일 뿐이다. 좌파 바람이란 착시 현상에 현혹돼 눈앞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달라지고 있는 중남미는 새로운 각성과 관심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상파울루에서>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