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불꽃튀는 정보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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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K사 사장실옆에는 명판도 안붙인 방하나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관계자의 출입금지」란 패찰이 문에 걸려있는 걸로 보아 얼듯 범상한 곳이 아니다. 그 방이 뭐하는 곳인지를 아는 사람은 회사내에서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과장급 1명과 대리 1명을 포함해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은 6명. K사의 정보맨들이다. K사내에서도 두뇌회전이 빠르고 믿을만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기업을 둘러싼 각종 정보의 수집·분류·분석·정리·보고. 보고는 사장에 대한 직보가 원칙이다.
기업 (특히 경쟁사) 정보는 물론이고 정치·사회·문화관련 정보까지도 수집된다. 수집된 정보는 분석과 종합과정을 거쳐 신뢰도에 따라 A급 (확인된 사실) 부터 E급 (확인할수 없는 루머) 까지로 분류돼「일일정보보고」라는 명칭으로 매일아침 사장에게 직접 전달된다.
『지내놓고 보면 70%정도는 맞는다』는 것이 K사 한 정보맨의 증언. 놀라운 정보력인 셈이다. 신제품개발·시장경쟁·대정부 로비등에서 K사가 항상 돋보이는 것도 이같은 정보력과 무관하지 않은듯 하다.
끝없는 변신과 적시안타의 대응이 철저하게 요구되는 오늘의 재계현실에서 남보다 한발앞선 1급정보는 곧잘 그 기업의 사세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한예를 보자. 혼미한 정국만큼이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9년8월 어느날, 이날따라 최종현회장의 얼굴은 유난스레 상기되어 있었다. 모처와의 짤막한 통화가 끝난 직후였다.
한동안 방안을 서성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 그는 갑자기 전화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주)선경의 김항덕이사(당시)와 손길승경영기획실이사가 긴장된 얼굴로 회장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최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그룹입원을 부르는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회장실 문을 걸어잠근채 세 사람의 밀담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이날 이후 3인의 비밀회의는 80년11월말까지 1년 4개월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되풀이됐다. 그동안 그룹내에서, 심지어 비서실조차 이들 세사람의 밀담내용을 전혀 알길이 없었다.
3인비밀회의의 내용이 비로소 밝혀진 것은 86년11월27일 박봉환 당시 동자부장관의 충격적 발표에서였다. 걸프의 한국철수에 따라 유공주식 50%를 선경에 매각키로 결정했다는것.
최회장이 남보다 한발 앞서 입수한 한토막의 1급정보와 기민한 대응은 선경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유공의 인수로 중규모 섬유재벌 선경은 상위권 재벌로 급성장하는 놀라운 변신을 이룩했다.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남보다 한발 앞서 입수하면 기업에 엄청난 득을 가져올수 있는 반면 이를 놓칠 경우 결정적인 손해를 입는다.
삼성·현대·럭키금성·대우·선경·쌍룡등 재벌그룹들은 대부분 정부 각부처별, 또는 은행·증권·세무당국등 각 분야별로 정보담당자를 두고 지연·학연등 모든 연고를 총동원,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제분야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분야까지도 망라한다. 해외지사망을 통한 정보수집도 마찬가지다.
인사동정에서 주요정책에 이르기까저 각 기업들이 거미줄처럼 쳐놓은 정보망은 쉴새없이 모든것을 잡아낸다.
삼성과 현대는 회장 비서실을, 대우는 그룹기획조정실을, 럭키금성은 그룹홍보실을 각각 정보수집의 총사령탑으로 하고 수집된 정보를 철저하게 분석한다.
많은 경우 그룹총수와「주요인물」과의 비공식접촉에서 얻어지는 정보가 귀중한 고급정보가 된다.
특히 대우의 김우중회장은 국내외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인사로 소문난 만큼 그룹총수가운데 개인적 정보확보력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최근들어 기업들의 정보전쟁은 해외시장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심지어 정부당국이나 신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이들은 확보하고 있다. 금기지역인 공산권을 맨먼저 뚫고 들어간것도 이들이요, 최근의 해빙무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역도 바로 기업이다.
삼성물산이 이란·이라크전쟁 발발 1개월전에 정보를 입수, 이들 지역에서의 수주경쟁에 참여하지 않아 손해를 입지 않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레바논내전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피난용가방을 서둘러 수출한 것과 남예멘지진의 영향을 신속히 본사에 보고, 천막의 대량수출에 성공한것도 삼성의 해외정보전에서의 승리로 손꼽히고 있다.
대우는「키신저」「헤이그」등 미국의 전직국무장관을, 현대는「홀브루크」전미국무성차관보등 전직 외국거물정치인들을 고문으로 위촉, 해외 고급정보 수집에 활용하고 있다.
자신들의 정보유출을 막기 위한 노력도 대단하다. 암호나 은어까지도 등장한다.
삼성은 한때 해외정보에「송죽」이라는 암호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암호는 수시로 바뀐다.
동아그룹의 경우 최원석회장의 해외나들이에는「별다섯이 떴다」는 암호를 쓰기도 했다. 이는 국내경쟁업체들에 최회장의 행선지를 은폐하기 위한것.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쏟고있는 첨단산업에서의 성패는 신속·정확한 정보에 달려있다. 경영정보는 물론이고 시장정보·생산정보·상품정보등의 신속한 수집과 분석은 성패의 관건이다. 각 기업들이 데이타뱅크를 구축하고, 컴퓨터시스팀을 도입해 정보의 축적과 활용에 열을 올리고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현상유지는 곧 도태를 의미하는 냉혹한 재계에서 각 기업들의 변신을 위한 몸부림은 갈수록 뜨거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재계의 정보전쟁은 더욱 더 불꽃을 튀길수밖에 없다. <톡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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