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하는 CEO' 엑사E&C 구본현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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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엑사E&C 구본현 대표가 수정발진기가 들어간 제품을 들고 있다.

전자부품 제조 및 건설업이 주력인 엑사E&C의 구본현(38) 사장에게 권투는 취미 이상의 의미다. 부도난 회사를 살리려고 안간힘 쓰던 시절 온갖 어려움을 견뎌낸 힘을 권투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회사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찮은 계기였다. 중학 2년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시라큐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군 복무를 위해 귀국했다. 1997년 육군 병장으로 전방 근무를 마친 뒤 미 대학의 석사과정 공부를 기다리던 중 부친의 권유가 있었다.'친구가 하는 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몇달간 사회 경험을 쌓으면 어떻겠느냐'는 것. 그 회사가 바로 엑사E&C의 전신인 예림인터내셔널이었다. 문구 유통과 사무실용 칸막이 제작을 하던 회사로 해외사업부 대리로 발령 받았다. 그러다 몇달 만인 그해 11월 외환위기가 닥쳤다. 연간 매출 60억원에 부채가 300억원까지 늘어난 이 회사는 결국 부도를 냈다. 300명 넘는 직원이 6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자투리 시간을 보내려 들어온 회사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경영진은 자취를 감췄고 사무직은 둘만 남은 상황에서 사실상 사장 노릇을 하게 됐다. 국내 유명 대기업 경영자를 부모로 뒀지만 '혼자서 어려움을 이겨내 뭔가 이뤄내야겠다'는 투지가 샘솟았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부모가 빌려준 5억원을 이 회사에 쏟아 부었다. 말이 투자지 잔류 직원들의 월급부터 줘야 했다. 창고에 재고로 남은 문구제품과 원자재를 차압하려는 채권자들을 사정사정 말리는 게 일과였다. 서울 광화문 매장 옆 지하주차장에 사무실을 빌려 숙식을 해결했다.

그가 권투와 접한 것은 이 때였다. 라면과 자장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다보니 몸무게가 20kg이나 늘었다. 길을 가다 우연히 권투도장 간판을 보고 '바로 저거다'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한 상대와 스파링을 하면서 케이오(KO)도 숱하게 당했다. "링에서 쓰러져 보니 나와 회사 상황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눈물이 날 때도 있었어요. 쉽게 무너지지 말자, 한 대만 더 맞고 쓰러지자고 버텼지요."

공교롭게 KO 당하는 횟수가 줄면서 회사 형편도 나아졌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3년 만인 2001년 법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문구 유통업을 접은 대신 클린 룸과 폐수처리 시설 등 건설업에 진출했다. 이런 구조조정이 수익성을 높였다. 지난해엔 영상부품을 다루는 코스닥 등록업체 이림테크를 인수 합병해 회사 이름을 엑사E&C로 바꿨다. 이 회사는 지난해 960억원의 매출과 46억원의 순익을 거뒀다.

구 사장은 요즘 정보기술(IT) 제품의 주요 부품인 수정발진기(TCXO)를 국산화 하는데 주력한다. TCXO는 휴대전화와 PDP .LCD TV, 자동차용 전자장비의 필수 부품이지만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 왔다. 이 회사는 지난해 자체 기술로 TCXO를 개발해 연 100만 개 생산설비를 갖추고 해외 수출을 시작했다. 그는"TCXO의 세계 시장 규모가 1조원 가량 되며 지난해 우리나라 수입품 가운데 대일 무역적자를 11번째로 많이 낸 품목"이라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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