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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산하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198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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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의 '하느님의 눈물'과 이오덕의 '울면서 하는 숙제' 등 스테디셀러 동화를 가진 도서출판 산하는 지금은 어린이 책 전문 출판사로 이미지를 굳혔지만 1980년대에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였다.

72년 전주고등학교 3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에 가담해 제적되기도 했던 소병훈(49.사진)사장이 83년에 등록한 출판사의 원래 이름은 이삭이었다. 대학 다닐 때 사회과학서를 영어와 일본어로 읽느라 고생했던 터라 후배들에게 좀더 쉽게 사회과학분야를 공부할 기회를 주자는 뜻에서 출판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온 책은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이었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헤겔을 공부하는 모임을 꾸리고 있던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헤겔 현상학에 있어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논문을 번역하고 마지막 장에 자신의 의견을 보탠 책이었다.

헤겔 관련서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 화제가 되었으나 즉시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말았다. 그래도 이 책은 대학가 서점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잘 팔렸다.

그 후 이삭은 85년 8월 출판 등록이 취소될 때까지 '판금' 전문 출판사로 이름을 날렸다. 2년 동안 '변증법 입문''청년 마르크스의 사상' 등 24종을 냈으나 문화공보부의 납본 필증을 받은 책은 이국자씨의 문학평론집 '시와 과학' 딱 한권뿐이었다.

이삭의 등록이 취소된 사연은 이렇다. 소사장은 85년 초부터 김정환 시인과 힘을 합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민족문학'을 출간하고 있었는데 제5호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제본소에서 경찰에 전량 압수당했다.

그 와중에도 소사장은 한 권을 몰래 빼내와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6천부를 찍어 서점에 배포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그해 8월에 등록을 취소당했다고 한다.

그 때 6천부를 찍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푸른숲의 김혜경 사장이다. 당시 현대그룹 비서실에 근무하던 김사장이 시댁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에서 이 책을 찍어 주었던 것이다.

그 후 두 차례 더 출판등록이 취소되자 소사장은 문화공보부를 찾아 관계자들에게 따졌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지방에 등록을 하되 이삭이라는 상호를 쓰지 않고 '불온서적'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86년 5월 전주시에서 탄생한 출판사가 산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것은 88년 말이었고 90년부터 어린이 책으로 돌아섰다.

소사장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는 것도 필요하지만 농촌 이야기와 소외된 도시 빈민의 이야기, 환경문제 등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방향에 맞춰 창작 동화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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