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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주민 생활 점령한 '메이드 인 차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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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국 단둥의 해관(세관) 옆 교통물류감독창고에 평북 번호판을 단 북한 트럭들이 화물을 싣고 주차해 있다. 이곳에서 각종 생필품을 실은 북한 트럭들이 압록강의 중조우의교를 통해 신의주로 건너간다. 단둥=최승식 기자

"중국의 영향력이 판문점까지 뻗쳐 오는 것을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압록강에서 저지할 것인가를 미국도 고민해야 한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가 최근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진지하게 건넨 얘기다. 핵문제로 막힌 남북, 미.북 관계의 틈새를 뚫고 팽창하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담긴 말이다.

정치에 비중이 컸던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동북 3성 개발'을 계기로 경제로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북한 소비시장은 '중국화'의 현주소다. 평양을 자주 오가는 중국 조선족 동포 사업가 J씨(70), 단둥(丹東)과 훈춘(琿春)의 조선족 무역상 P.H씨, 탈북자 L씨 등의 말을 종합해 실태를 알아본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국제=평양의 중산층 주민 A씨는 하루를 중국 생필품으로 시작한다. 치약.칫솔.비누.면도기.수건 등이 대부분 중국제다. 아침 음식도 중국산 재료가 많다. 밥 짓는 쌀과 강냉이, 된장국의 소금.조미료가 중국산이다. 식사 후 마시는 차와 귤도 그렇다. 내의와 양말.구두도 중국산이다. 양복은 중국산 원단을 북한에서 가공한 것이다. A씨가 사무실에서 쓰는 흰색 용지와 볼펜도 중국제다. 북한산 용지는 거칠고 어두워 잘 안 쓴다. 골초인 그는 독한 북한산보다 중국산 담배를 즐겨 피운다. A씨의 부인 B씨도 마찬가지. 옷과 신발은 물론 스킨로션.분.립스틱 같은 화장품 모두가 중국제다. 집에는 중국산 텔레비전이 있다. 부부는 중국산 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든다.

중국발 '황화(黃化)' 바람은 평양 상점들에서 더욱 거세다. J씨는 "시내 백화점과 국영 상점의 상품 대부분이 중국제"라고 말한다. 중고 자동차, 일부 가전 제품이 일본과 미국.동남아에서 수입되지만 '새발의 피'다. 북한 자체 생산품은 농산물과 일부 생필품 정도다. 훈춘에서 북한과 거래하는 H씨는 "주로 질이 낮은 저가품들이 많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여기에 통계에 잡히지 않는 국경지역의 밀무역을 통해 들어가는 중국 상품도 엄청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탈북자 16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 '북한 경제의 대중국 의존도 심화와 한국의 대응방안'도 이 같은 증언을 뒷받침한다. 종합시장 내 중국 상품 유통 정도에 대해 다수 응답자가 "식료품.공산품의 80~90%가 중국산"이라고 답했다. 국영상점(수매상점)의 중국산 비율도 "90% 혹은 95%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다수였다.

◆ 국경도시는 '생명줄'=북한의 '조선 김일성화 김정일화 위원회'는 최근 중국에서 100만 달러어치 내복 구입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단둥의 조선족 사업가 P씨는 위원회 무역일꾼을 통해 이 말을 듣고 놀랐다. 북한 무역일꾼이 단일 품목을 이처럼 많이 사가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무역일꾼들은 중국에서 '싼 물건'을 조사한 뒤 견본을 들고 돌아갔다.

선양의 우아이(五愛) 시장은 최근 급부상하는 소비재 시장이다. 품목이 다양하고 값이 싸 북한으로 들어가는 생필품의 상당 부분도 여기에서 거래된다. 대부분 물건은 무게로 달아 판다. 대북 무역상들은 신발이나 운동복.점퍼 등을 한꺼번에 몇 t씩 사가기도 한다.

중국 상품의 가장 큰 북한 유입 통로는 단둥이다. 단둥 세관은 새벽부터 물품을 통관하려는 상인과 차량들로 북적댄다. 철도.도로 겸용으로 단선인 다리를 일방 통행식으로 하루 세 번 개방하기 때문에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하다.

세관 앞 얼마루(二馬路)의 도로 양편으론 중국어와 한글 겸용 간판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북한과 거래하는 무역회사들이다. 어림잡아 100개는 훌쩍 넘어 보인다. 현지 업자는 "중국인이나 조선족.화교들이 운영하는 회사가 대부분이지만 내각 소속 북한 무역 대표부도 20여 개나 된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는 몇 년 새 팽창한 대북 교역 덕에 월 1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며 잘나가는 회사도 많다. 단둥에서 농산물 임가공 사업을 하는 한국인 G씨(45)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80% 정도가 단둥을 거친다"며 "단둥은 북한의 생명줄"이라고 했다. 나머지를 옌지(延吉).창바이(長白).투먼(圖們) 등의 중국 국경도시들이 담당한다. 대북 수출품 목록은 다양하다. 미국이 전략물자로 지정해 북한 반입을 금지시킨 컴퓨터도 공공연히 들어간다.

단둥.투먼=안성규.유철종 기자 <askme@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북한의 대응은
'중국에 예속' 불안감
소비재 생산 배가운동

북한은 소비재 생산 배가 운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북한의 올해 신년 공동사설은 "경공업부문에서 생산공정을 적극 현대화하여 질 좋은 인민소비품(생필품)이 쏟아져 나오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정부는 경공업성을 중심으로 소비재 산업 발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북한 언론들도 이같은 정부의 노력과 개별 기업들의 성과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평양방송은 21일 "경공업성이 주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섬유와 신발 공장을 현대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경공업성 방직공업관리국이 평양방직공장의 염색과 직포 공정을 현대화하고, 신발공업관리국은 원산 구두공장과 신의주 신발공장의 생산공정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23일 노동신문은 인민소비품 생산 증대를 강조하며 신의주 화장품 공장과 기초식품 공장의 경영기법 현대화와 시설 자동화 등의 성과를 홍보하는 기사를 실었다. 북한 언론들은 올 들어 이처럼 소비재 산업 현대화와 생필품 생산 증대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들을 부쩍 자주 싣고 있다.

2004년 중국 지원을 받아 평남에 대안친선유리공장(4000억원 규모)을 세운 뒤 유리 수입을 금지하고, 평양에 종이 박스 공장을 설립해 내수의 경우 우선적으로 이 공장 제품을 사용하게 하는 것도 '수입대체 산업 육성'전략의 일환이다. 국내 소비재 생산 기반 확충을 위해 외국 자본 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이영훈 박사는 "경제가 중국에 예속돼 가는 데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북한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며 "그러나 당장 구체적 성과가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남측이 개성 공단에 소비재 생산을 위한 투자를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이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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