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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발 무역전쟁, 대공황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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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1930년대와 유사한 흐름이다.”

철강 관세가 EU 등 보복관세 촉발 #미, 88년 전에도 관세폭탄 방아쇠 #전 세계 무역장벽 높여 교역 위축 #수출 의존도 높은 한국엔 치명적

통상전문가인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최근 트럼프 발(發) 무역 전쟁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심 교수뿐이 아니다. 해외 전문가도 비슷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 ‘미국의 관세 폭탄 → 교역 상대국의 보복 관세 부과 → 국제 교역 및 세계 경제의 급격한 위축’이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공황의 전조’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최근 CNBC 방송에 출연해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 관세 부과는 무역 전쟁으로 가는 첫 번째 총성”이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제품에도 관세를 부과하려 할 것이며 이는 대공황 당시에 발생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발 무역전쟁

트럼프발 무역전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수입산 철강에 고관세를 매기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글로벌 무역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각국은 즉각 ‘보복’을 예고했다. 실행도 빠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16일 미국산 제품 200개의 목록을 발표했다. 수입액 기준으로 연평균 28억 유로(약 3조6818억원)에 해당하는 미국 공산품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미국산 쌀, 콩 등 농산물과 함께 물론 할리 데이비드슨과 같이 미국을 상징하는 주요 제품도 보복관세 목록에 포함됐다. 대서양을 맞대고 미국과 유럽 간 관세 전쟁이 현실화한 셈이다.

여러 전문가가 이런 흐름을 보고 대공황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유는 뭘까. 30년대 전후의 사정을 보면 이해가 된다.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2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의 끝자락에서 시작됐다. 29년 10월 29일 주가 대폭락이 그 서막으로 여겨진다. ‘검은 화요일’로도 불린다. 하지만 진짜 대공황의 시작은 따로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존 스틸 고등은 저서인 『월스트리트 제국』에서 “대공황은 29년 10월 29일 주가 대폭락이 아니라 이듬해 6월 17일 제정된 보호무역법인 스무트-홀리법 제정 이후 시작됐다”라고 밝혔다.

근거가 있다. 이 법은 2만개가량의 수입품목에 대해서 평균 60%의 관세를 매겼다.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 법이 나오자 다른 국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 10여 개국이 보복관세를 매겼다. 독일은 미국과의 교역을 아예 단절했다. 각 나라가 우후죽순 무역 장벽을 높인 결과는 글로벌 교역 위축이다. 29년 84억 달러 수준이던 전 세계 교역액은 33년에는 3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결국 30년 미국의 ‘관세 폭탄’조치가 세계 경기 악화로 귀결됐고, 트럼프 대통령이 당긴 무역 전쟁 방아쇠 역시 비슷한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안팎의 우려에도 트럼프식 ‘마이 웨이(My Way)’는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무역 전쟁은 좋은 것이며 이기기도 쉽다”라고 밝혔다. 이는 세계 각국이 대공황을 통해 뼈저리게 얻은 교훈인 자유무역 기조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수십 년간 구축돼온 자유무역 질서가 미국 대통령의 변덕으로 상처를 받게 됐다”고 밝혔다.

이러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기여한 비중은 64.5%로 2012년 이후 최대치였다.

게다가 현재 무역 전쟁무역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EU와 함께 미국의 최대 라이벌인 중국이 미국에 대한 보복을 현실화하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더 커질 수 있다. 한국 경제가 받는 타격은 그만큼 커진다. 지난해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3개 경제권의 비중은 중국(24.8%), 미국(12%), EU(9.4%) 순이다.

다만 캐나다 등 전통적인 미국 우방에 역풍을 맞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호무역의 고삐를 다소 늦출 수는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캐나다와 호주 등이 미국의 철강 관세 부과에서 제외되는 등 주요국의 대응에 트럼프 행정부가 속도를 고르는 모습도 보인다”라며 “한국도 EU 등 미국에 대응하고 있는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실익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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