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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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학생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들고 나옴으로써 우리 사회는 지금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학생들은 10일 오후 판문점에서 북한 대학생들과 회담한다는 일정을 잡아 놓고 카운트다운 속에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학생들의 판문점 행 강행태세에 경찰은 원천봉쇄로 맞섰다. 벌써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거나 수배됐다.
통일문제와 민주화 등 현상에 불만을 품은 학생 몇은 투신과 분신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6·10 판문점회담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학생도 있는 것 같다.
정부는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학생의 지지를 받고 그들을 대표한다고 자칭하던「영웅」 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그 흔하던 정치의 재 사들은 어디에 숨었는가. 사회는 지도력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마치 1년 전 이때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학생들은 출신배경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초 계급적 순수성과 범 계층적 공정성을 지녀 왔다. 그들은 항상 민족의 전위대로 자부하며 현실에 도전하고 이상을 추구해 왔다. 그 때문에 과오가 있어도 사랑으로 받아 왔다. 4·19나 6·29 같은 화려한 승리도 쟁취했다. 그 때문에 현실참여와 문제해결에 자신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그 자신이 자만으로 흐르는 것은 아닌가. 이상이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면 공허한 환상이 된다. 목표가 아무리 좋아도 방법에 하자가 있으면 실패하게 마련이다. 일의 성패는 시기와 순서와 환경에 좌우된다.
경험과 역사는 항상 가장 믿을 수 있는 스승이었다. 4·19와 6·29의 승리는 국민적 합의 위에서 가능했다. 국민의 동의에서 동떨어졌던 5·16전의 과잉행위와 10·26후의 파격시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남북간의 학생회담 시도는 이미 27년 전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금 똑같은 방식으로 그날의 전철을 반복하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못된다.
대학생들의 6·10판문점회담은 자제해야 한다. 그 계획과 준비도 철회돼야 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첫째는 그것이 국민적 합의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단국끼리의 상호접촉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6·10 접촉은 학생사회의 컨 센서스 창출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학생들이 역사와 국가의 주체로 내세우는 민중의 지지도 못 받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62%(중앙일보 설문조사)가 판문점 학생회담에 반대한 사실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둘째로 학생들에겐 회담주체로서의 대표성이 없다. 북한측과 접촉하려면 정부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세계적인 관행이요 법의 규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요구다. 각개 집단들이 제각기 외부세력과 접촉하여 국사를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결코 질서 잡힌 국가사회가 아니다.
세째는 회담의제가 학생 신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뿐만 아니라 올림픽공동개최와 이산가족 재결합 문제까지도 타결하겠다고 호언했다. 그것은 해당분야의 책임자와 전문가들이 할 일이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네째는 준비 부족이다. 남북문제는 고도의 전문 분야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 아마추어다. 더구나 학생들은 통일 방안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대북 정책의 방향이나 체계를 마련치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의욕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우리는 통일을 열망한 나머지 기성질서를·제쳐놓고 나선 대학생들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기성 층이 북한을 적대세력으로 보고 마치 외국을 상대하듯 국제외교방식으로 접근하는데 젊은이들의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반작용으로 남-북 문제를 내부문제로 보고 민주화운동처럼 국내문제 해결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북한은 우리를 적대시해 온 엄연한 대항세력이다. 그들은 같은 겨레이면서 무력통일을 기도하여 6·25를 일으켰다. 그때의 지도자가 그 체제, 그 전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북쪽엔 우리 대학생 같은 순수하고 공정한 학생이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된 학생차림의 적위대 일 뿐이다.
북한과 대화를 하더라도 이런 엄연한 사실에 눈감아선 안 된다. 사실을 떠난 당위나 현실을 무시한 목표는 성립될 수 없다.
대학생들이 계속 정치적인 현실에 참여하려 한다면 다음 두 가지를 권고하고 싶다.
하나는 통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학생회담을 위해 서둘러 판문점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학생들의 생각을 다듬어 국민의 판단에 붙여 합의를 얻어내야 한다. 그것을 정당이나 여론을 통해 국회와 정부에 인푸트(입력) 하여 정책화시키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것이 민주국가에 가장 보편적인 의사 집결방식이다.
이산가족 재결합이나 올림픽공동주최도 직접 떠맡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구성돼 있는 전문가들의 적십자 회담과 체육회담을 조속히 재개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것은 서울당국 뿐만 아니라 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평양 당국에 대해서도 취해져야 한다.
다음은 민주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통일문제보다도 더 적절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민 의에 바 탕한 개헌과 민선정부가 성립되긴 했지만 우리의 민주화 도정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악법개폐와 비리 척결 등 제5공화정 유산의 정리도 급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민주주의 관행을 축적하고 안정과 능률을 유지하면서 민주화를 진척시켜 나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엔 학생들의 참신한 발언이 요구된다.
정부는 앞선 정책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해야 한다. 과거의 안일에서 나와 신선하게 도전해야 한다. 야당과 재야는 학생들의 눈치를 보거나 영합해선 안 된다. 어른다운지도력을 발휘하여야 문제해결에 접근케 된다. 정부와 학생의 대화만 요구하는 것은 책임회피이며 실효성도 없다. 기층의사의 수렴은 1차적으로 정당과 국회가 할 일이다.
6·10 판문점 집회는 결국 무산되겠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파란이 연속되는 과도상황이다. 그러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도 없다. 계속 전진해야 한다. 그 전진은 학생의 정열과 이성, 기성의 이상과 현실이 결합될 때 더욱 활성화된다. 그러나 학생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예비역이지 오늘의 주역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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