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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물 흐르는 대로만 살라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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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선사시대 사랑이야기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이현경 옮김,열림원

"난 평생 힘들게 노력하며 살았지만 네게 남겨줄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정직한 자의 운명이란 이와 같은 거란다. 대신 한 가지 충고를 해주마. 네가 인생에서 행복을 찾고 싶으면 흐름을 타도록 해라. 어떤 경우에도."

십억 년 전 아프리카 자이르 숲에서 나이 많고 지혜로운 고릴라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교훈입니다. 그러자 아들 고릴라가 묻습니다. 흐름을 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흐름을 타면 어디로 가는 건지.

아버지 고릴라는 "흐름을 탄다는 것은 대다수의 편에, 그러니까 수가 더 많은 편에 서는 것을 말한다"며 "그러면 강물의 흐름을 타고 아래로 떠내려가듯 목적지에 닿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운명하자 아들 고릴라는 흐름을 타기 위해 자이르 강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러다 피그미 족의 뗏목을 얻어탄 뒤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기만 하는 즐거운 나날이 계속됩니다. 아들은 당연히 귀중한 조언을 해준 아버지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이 마냥 계속될 수는 없죠. 급류를 만나 난파해서는 바다까지 떠밀려갑니다. 통나무 하나에 간신히 올라타고 보니, 웬걸 바다에는 물의 흐름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도 없는 흐름이 시시각각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사방이 중심이고, 중심이 없기도 했습니다.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던 아들 고릴라는 마침내 영국 증기선에 의해 구조됩니다. 그러고는 선장에게서 증기선은 강물을 역류해서 갈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런던 동물원에 실려갈 것이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거기서 아들 고릴라는 고향에 남은 엄마 고릴라에게 "강물의 흐름을 역행해 가다가 우리에 갇히게 되었어요"라고 끝맺는 편지를 띄웁니다.

이 책에는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런 이야기 24편이 실렸습니다. 거머리만한 고래, 빨간 우산을 들고 다니는 브론토사우루스라는 공룡, 책을 쓰는 지리교사 펭귄 등이 등장합니다. 황새를 사랑하다 버림받는 올빼미도 나옵니다.

예, 맞습니다. 이 책은 우화집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작가가 일흔 살이 넘어, 어른들을 위해 썼다는데 안데르센 상도 받았답니다. 여기 실린 우화는 교훈을 드러내지 않는 미덕을 가졌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환상의 세계를 헤맬 수도 있고, 혼자 곰곰이 이야기 속의 교훈을 헤아려도 좋습니다. 봄날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읽기에 딱이지만 '우화는 힘이 세다'는 걸 새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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