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이승만 박사의 젊은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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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6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131회 탄신일이었다. 예년과 다름없이 그를 추념하는 모임과 예배가 정동교회에서 있었으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되돌아보거나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 근대사의 가장 큰 인물 중 한 사람인 이 박사가 이처럼 잊혀가고 있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정부가 나서서 과거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건국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이승만의 생애에 대한 균형 있는 재조명이 더욱 아쉽다.

인간의 일생을 시기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이승만 박사의 90 평생(1875~1965)은 크게 청소년기, 독립운동기, 대한민국 초창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립운동기, 대한민국 초창기의 정치역정과 관련된 부분은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고, 이 시기 그의 업적은 사가(史家)들이 시간을 두고 평가하리라 믿는다.

지금 우리는 젊은이들의 문화가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기회에 우리 초대 대통령의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돼 이승만 연구의 대가인 유영익 교수의 저서 '젊은 날의 이승만'을 참고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짚어 보려고 한다.

대단히 총명했던 이승만은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의 기초를 닦았지만 그의 나이 14세부터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시험의 합격 여부가 그 사람의 능력이나 미래를 절대적으로 판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그가 과거에 급제했더라면 그 자신이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20세란 늦은 나이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해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고, 30세에 도미(渡美)해 불과 5년여 만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요사이 유행처럼 떠나는 조기유학만이 성공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일찍이 보여준 셈이다.

배재학당에서 이미 세계사와 서양문물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고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에 가입했던 이승만은 졸업 직후 법치주의와 민주제도 확립을 위한 개혁운동, 민권운동, 대중운동의 선봉에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부녀자를 포함한 대중을 위한 한글로 발행된 제국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주필로서 언론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한편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서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 반대를 위한 종로에서의 대중집회와 공화정 실시 음모로 체포된 이상재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경무청 앞 철야농성을 주도하는 등 개혁운동의 투사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3세인 1898년 11월 초보적인 의회의 모양을 본뜬 중추원이 발족하며 이승만은 50명 의관(議官)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조선조에서 얻은 유일한 관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종9품의 그 벼슬은 34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는 고종의 폐위와 혁신내각 구성을 획책한 음모에 연루돼 경무청에 체포 수감됐고 혹독한 고문 후 목에는 무거운 칼을 쓰고 손발을 수갑과 족쇄에 묶인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게 됐다. 다행히도 1899년 7월 그에게 종신형이 선고되고 이후 두 번의 특사로 형기가 10년으로 단축됐다가 1904년 러일전쟁 후 5년여 만에 석방됐다. 지금의 영풍문고 근처에 있던 종로감옥에서 29세까지 5년여의 수감생활을 하던 중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특히 죄수들을 위한 옥중학교와 도서실을 개설하는데도 앞장섰다.

'독립정신' 집필, 영한사전 편찬 등 바쁜 나날을 지내며 앞날에 대비하던 그는 감옥에서 나온 바로 이듬해, 약관 30세 청년의 몸으로 민영환의 지시에 따라 도미해 존 헤이 국무장관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그의 청년기는 젊음.지성.애국심이 한데 어우러진 한 편의 드라마였으며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큰 뜻을 품을 수 있도록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